[가톨릭 신학] 사랑과 자비라는 이름에 숨어 종종 사랑과 자비로 모든 것을 수용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우에 맞지 않는 행동을 보며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감싸주고 사랑하지 않으셨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 참으로 옳은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식별이 필요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사랑과 자비라는 이름으로 어떠한 잘못이든 허용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하느님의 계명과 질서는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내가 악을 저질러도 하느님이 알아서 용서해 주실 테니까요. 이것은 정말 커다란 악의 유혹입니다. 구체적인 판단을 그르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번식하고 더 강력해지는 경향이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865항)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하셨을까요? 실제로 예수님이 사랑 가득한 분이었음은 분명합니다. 미움받는 세리 출신의 마태오를 제자로 받아들이셨고,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셨으며,(마태 9,9-13 참조) 간음한 여자를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요한 8,1-11 참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사랑과 자비를 베푸신 것만은 아닙니다. 불의에는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셨는데, 성전 정화 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요한 2,13-22 참조) 또한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자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3)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진실을 왜곡하는 태도를 적극적으로 비판하십니다. 바로 여기서 사랑의 기준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을 뉘우치는 이들은 스스럼없이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한편, 윤리적 잘못을 저지르는 이들과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떠한지요? 사랑과 자비라는 이름에 숨어 나의 잘못을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낙태, 동성애 행위, 부정부패와 같은 세상의 잘못을 용인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혹은 선악의 기준을 편의에 따라 스스로 세우고 있지는 않은지요.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런 식으로 진리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들은 사라지고, … ‘편한 마음’이라는 기준에 그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일부 진리는 윤리적 판단의 주관적 사고에 적응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진리의 광채> 32항) 누군가는,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교회는 왜 여전히 보수적인 윤리를 고수하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에 맞춰 변화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계명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진리는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내가, 혹은 누군가가 잘못을 했다면, 교회의 가르침을 분명히 인지하고 성사를 통해 올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하느님이 그를 따뜻한 사랑으로 인도하실 것이며 우리의 삶은 반짝이는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2024년 10월 6일(나해) 연중 제27주일 서울주보 5면, 방종우 야고보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윤리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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