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인의 일치(교회일치 신학) 살다 보면 기다려지는 만남이 있습니다. 반대로 만남 자체가 부담스러워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관계 속에 위계가 생겨날 때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자 혹은 약자라고 느껴질 때, 수평적인 대화보다는 명령 하달의 소통이 이루어질 때, 설렘의 관계는 무너지게 됩니다. 오랜 세월 동안 교회 안에서 ‘교황 수위권’(Primatus papae)은 그렇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수위권은 모든 교회 위에 최고의 재치(통치와 규율)와 무류적 교도(신앙과 윤리)를 행사하는 교황의 권한(Pastor aeternus)이라고 강조되어 왔지요. 이것이야말로 교회를 다스리고 가르치는 절대적인 권력 행사로 이해되었고, 가톨릭교회 외부인들에게 위화감을 주었습니다. 첫 번째 사도에게 부여된 권한이 오히려 분열과 다툼을 야기한 셈입니다. 하지만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때부터 이러한 분위기에 변화의 불길이 당겨졌습니다. 성인께서는 수위권의 직무는 분열의 원인이 아니라, 일치와 친교를 이루는 책임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교황이라는 직책은 우두머리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봉사와 섬김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하나 되게 하소서〉 89,94,95항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임기 시작부터 ‘로마의 주교’라는 직함을 사용하시며 형제 · 교회적 친교에 대한 방향성을 알리셨습니다. 교황님은 회칙에서 동방정교회 총대주교의 가르침을 언급하셨고, 루터교 연맹 지도자들과 일치 공동기도회에 참석하기도 하셨습니다. 또 분쟁이 있는 곳에서는 그곳 종교 지도자들과 평화의 순례를 하기도 하셨지요. 이주민과 난민을 환대하고, 다스리기보다 가난과 겸손의 모습을 보이는 교황님의 행보는 가톨릭 신자가 아닌 일반인의 눈에도 크고 작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일치 행보는 시노달리타스의 여정을 직접 걸으면서 수위권의 직무를 행사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함께 걷는 여정인 시노달리타스는 교황 수위권과 상호보완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위권 사명의 본질이 일치와 친교에 있기에, 이 권한은 명령이 아닌 시노드적인 방식으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시노드의 역동성 안에서 수행되는 수위권은 더 이상 경직된 분위기가 아닙니다. 백성들 간의 만남에 기대감을 주고, 우리가 교회 안에 함께 있음을 느끼게 하니까요.(〈로마의 주교〉 4장 참조) 교황은 열두 사도 중 첫 번째 제자인 베드로의 후계자로 공동체의 대표성과 함께 재치와 교도의 직무를 가집니다. 교황의 권한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그대로 응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치를 지향하는 베드로의 직무는 충분히 우리 삶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교황의 첫 번째 임무는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교회 전체가 같은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사랑을 참되게 반영하며 겸손과 연민으로 사는 삶을 지향할 때, 우리는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2024년 10월 13일(나해) 연중 제28주일(군인 주일) 서울주보 5면, 전인걸 요한보스코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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