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함께 “교리 문해력” 높이기 (34) 성령 로마 유학 시절 들었던 강의 가운데 교회 안의 카리스마(은사)라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 여러 주제를 다루는 가운데 하루는 성령쇄신운동에 대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강의를 시작하며 그 자리에 모인 전 세계의 신부들에게 각자 너희들 나라에서 성령쇄신운동은 어떻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성적 탐구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교의 신학 전공자들이 모인 곳임은 감안해야겠지만, 신기하게도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성령쇄신운동은 비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성령쇄신운동 자체의 문제라기보단 거기에 지나치게 빠져 있는 사람들이 본당 공동체의 일치를 저해하고 교회에 순명하지 않는다는 것이 비판의 주된 이유였습니다. 제 경험으로도 성령기도회가 갖고 있는 일반적인 이미지나 처한 상황들을 보면 부정적인 경우를 더 많이 봅니다. 조용하고 차분한 천주교의 일반적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에 어색함을 느끼기도 하고, 자기들끼리만 뭉쳐서 다른 신자들과는 함께 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다 보니 성령께 기도하는 것 자체, 성령의 도움을 청하는 것 자체가 신자들 사이에서 주류가 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령기도회의 지극히 일부 잘못된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야 문제가 있지만 신앙의 대상인 성령께 기도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오히려 성모님을 포함하여 성인들에게 전구를 청하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장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참조) 그리스도와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고 우리 신앙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생명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도 성령은 첫째 자리를 차지하는 분이십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83-684항). 그런데 문제는 정작 우리가 성령에 대해 분명하게 아는 것은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나 성모님처럼 분명한 대상으로 인식되질 않으니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은 성부를 명확히 선포하고 성자는 모호하게 선포하였으며, 신약성경은 성자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성령의 신성을 엿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84항).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로 각 위격이 분명하게 계시되는 때가 있어왔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주시지만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만 성령을 알 수 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87항). 우리를 위한 구원 계획의 처음부터 끝까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일하신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 가운데에도 늘 함께하셨습니다(잉태, 광야에서의 유혹, 세례 등).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우시고 성령강림을 통하여 나타난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성령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교회를 “성령께서 피어나는 곳” (로마의 성 히폴리토, 사도전승, 35)이라 하기도 했습니다. 성경과 성전, 교회의 교도권, 성사와 기도, 은사와 직무, 사도적 삶과 선교적 삶, 성인들의 증거들 안에서 우리는 성령의 활동을 발견하며 이를 통해 성령에 대해 알게 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88항). QR코드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이북을 보실 수 있습니다. 교리서 296~300쪽, 683~690항을 함께 읽어보시면 좋습니다. [2024년 11월 24일(나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춘천주보 4면, 안효철 디오니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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