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리 상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희년에 대해 알려주세요 이제는 5년도 더 된 일이지만, 서울 시내 어느 아파트 단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곳은 1차, 2차라는 이름으로 서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같은 브랜드의 아파트가 서로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아파트 단지 가운데를 관통하는 도로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도로의 유지보수비를 누가 부담하느냐를 놓고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갈등이 커진 끝에 한쪽에서 다른 쪽의 차량 진입을 막는 말뚝을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반대편 아파트 단지에서 철제 보안문을 설치하여 아예 사람도 못 다니게 막고, 해당 아파트의 주민에게만 통행할 수 있도록 열쇠를 나눠줬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그 반대쪽 단지에서 바리케이드와 철조망까지 설치하여 삼엄하기 짝이 없는 곳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배타성의 장벽을 세우며, ‘우리’라는 범주 밖에 있는 사람들을 밀어내곤 합니다. 단순히 이득을 위해서 그렇게 할 때도 있지만,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함에서 그러할 때도 있습니다. 종교가 달라서, 경제적 지위가 달라서, 성별이 달라서, 세대가 달라서, 정치적 입장이 달라서, 다른 이들을 ‘우리’가 아닌 사람으로 규정하고 밀어내곤 하죠. 심지어는 아파트 단지가 다르다는 이유로 밀어내기도 한다니, 웃고 넘길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이 모든 종류의 차별과 혐오, 배타성과 불평등을 뛰어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발자취 중 하나가 바로 ‘희년’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50년 주기로 서로에게 진 빚을 완전히 탕감하고, 노예가 있으면 해방시키며, 하느님의 자비와 해방을 기억했습니다. 구약의 백성이라고 빌려준 돈을 못 받고, 샀던 노예를 무상으로 해방시키는 것이 안 아까웠을까요. 하지만 하느님께서 그들을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먼저 해방시켜 주셨기에, 이스라엘에서 누리던 그 모든 삶이 가능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감정을 뛰어넘는 실천이 바로 구약의 ‘희년’이었습니다. 초대교회도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 여정은 경제, 사회적 장벽을 허물어, 부유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과, 지배하던 이들이 지배당하던 이들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는 ‘희년’의 정신이 가득한 분이셨던 셈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오르셨던 여정을 성지순례로 이해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동안의 삶을 참회하고 하느님과 화해하며, 순례의 여정을 떠나는 신약의 희년을 기리기 시작했습니다. ‘희년’을 맞아 드러나는 중요한 하느님 자비의 표지 중 하나는 ‘전대사’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죄와 벌을 대신 짊어진 자비로운 분이심을 다시금 기억하고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다른 이들을 향하여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분의 자비를 충만하게 입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현재 희년은 바티칸에서 4대 대성전의 성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닫혀 있던 문을 여는 예식은 우리가 서로에게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여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서로에게 철조망을 치고, 인터넷에서 악플을 날리며 혐오를 일삼는 이 시대에, 구원의 문을 여시는 주님 뒤를 따라, 우리도 마음의 문을 열고 이 세상을 향해 ‘희년’을 선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25년 6월 29일(다해)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교황 주일) 서울주보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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