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도 법이 필요한가? 지난해 이맘때든가 교구법원에서 관계자 모임을 하던 중 어떤 자매에게 전화를 받았다. 몹시 기가 죽은 듯한 목소리로 울먹이며 이혼을 했던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고는 이혼한 경험이 있던 자신이 이렇게 후회스러운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 자매를 안심시키고 차근차근 물으니, 이혼하고 몇 년 지나 이제는 성당에 다니고 싶은 생각이 들어 교리반에 다녔는데, 영세할 시기가 되어 수녀님이 호적등본을 준비해 오라는 말을 들으면서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고 했다. 천주교가 엄숙하고 엄격해서 이혼했던 사실이 드러나면 문제가 될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수녀님께 등본을 제출하고 나서 자신을 성당으로 이끌었던 자매님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근심스런 표정으로 물으니 모두들 한결같이, “자매님은 이혼을 해서 조당 상태이니 세례를 받을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하느님께 의지하고 살려고 성당에 나왔더니 사회와 다를 바 없이 죄인 취급을 받는 신세구나 하는 생각에 사는 게 싫었고 세상도 성당도 원망스러워 개신교 교회나 가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누군가 사정을 알고 교구법원에 문의를 해보라 해서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내용을 정리해 보니 이러하였다. 이 자매는 유아 세례를 받은 전남편과 예식장에서만 혼인하여 두 해를 같이 살았는데, 남편의 술과 도박, 여자 문제로 도저히 살 수 없어 이혼을 하고 몇 년 뒤 지금의 남편을 만나 혼인신고를 하고 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자매님께 “세례를 받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늦었지만 오늘부터라도 집중교리에 참여하고 영세 준비를 하세요.” 하고 말씀드렸다. 이렇게 하여 그 자매님은 아무런 문제 없이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자매님이 기쁨의 눈물로 세례를 받았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흔히 천주교 신자가 혼인하고 이혼하면 무조건 ‘조당’이라고 생각하고, 성사생활을 할 수 없다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흔히 말하는 조당은 이혼하고 새로운 혼인을 맺으려 할 때만 발생되는 것이고, 또 요즘엔 조당이라는 말 대신에 ‘장애’라는 말을 쓰고 있다. 따라서 혼인 장애가 있어도 그 자체만으로 성사생활의 길이 막히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관면이나 ‘특전’을 통해서 성사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이 많이 있다. 단순히 이혼했다고 해서 성사생활을 못하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해 재혼을 하지 않은 이상 성사생활에는 문제가 없는 것이다. 위에서 예를 들었던 자매님의 경우, 전 남편이 천주교 신자인데도 성당에서 혼인성사(관면 혼배)를 하지 않고 예식장에서만 했다. 따라서 이들은 교회법 제1059조에서 규정한 대로 나중에라도 교회법상의 절차를 지켜야만 그 혼인이 교회법상 효력을 지닐 수 있는데, 두 사람은 전혀 교회법상의 규정을 지키지 않았기에 함께 살았을지라도 교회법상 효력을 지닐 수 없는 혼인생활이 되게 한 것이다. 결국 교회법상 이들은 불법적 동거를 한 셈이고, 따라서 이 자매가 새로운 혼인을 맺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런 규정을 악용해서는 안된다. 이렇듯 우리 교회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면 누구나 지켜야 할 교회법전이 있다. 흔히들 교회법이라고 하면 혼인법을 떠올리지만, 그 외에도 교회법에는 가시적 교회를 통치하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세례를 받은 신자들을 조직하고 통할하기 위해 1983년에 반포한 1752개의 법률이 있다. 간단히 살펴보자면, 교회의 일반규범과 성직자 평신도에 관한 규정(의무와 권리 등), 교회의 교계구조, 수도생활에 관한 법, 가르치고 성화하고(7성사에 관한 규정)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한 행위와 장소에 관한 법, 교회의 재산, 형법, 그리고 소송법 등이 있다. 어떤 이는 이러한 법이 교회에 있을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사랑과 믿음이 있으면 그만이지.’라고.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로마서 3장 21절과 갈라디아서 2장 16절을 그 근거로 내세우며,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는 율법을 지키는 것과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믿음을 강조하면서도 결코 율법의 가치를 무시하지 않았고(로마 3,31; 13,8; 갈라 5,13; 6,2; 1고린 5-6장 참조).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련된 법은 구원적 성격을 지닌다고 이해하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역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선언하셨다. 교회 안에서 법이 필요한 이유는 교회의 사회성에서 기인한다. 교회는 양면적인 모습을 가지는데. 신앙, 은총, 카리스마 등의 보이지 않는 모습과 지상에서 사람들을 위한 단체라는, 보이는 모습이 그것이다. 따라서 교회법은 교회의 내적 특성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가치에 우선 순위를 둔 질서의 확립, 교회의 생활에서 구성원들의 유기적 발전을 꾀하는 수단으로 인정되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법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왔고, 특별히 12세기 중엽 그라시아노 수사는 그 동안 교회 안에 산재해 있던 법령들을 한 권으로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1580년 교회법 대전을 반포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가톨릭 교회의 고전법으로 여겨졌다. 그뒤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를 계기로 새 법전이 요청되어 수십 년의 작업 끝에 1917년 새 법전을 반포하게 되었다. 그뒤 세상은 급변을 거듭하였고 시대에 대처하고자 새로운 교회법이 필요하게 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를 계기로 새 법전의 편찬 작업이 시작되어 현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3년 현행 교회법전이 탄생하게 되었다. 법전 편찬 작업은 공의회가 끝나자마자 본격화되었는데, 이런 이유로 현행 법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심지어 공의회 문헌을 그대로 옮겨놓은 부분도 있다. 교회법은 획일성을 강조하기보다는 때와 장소, 또는 인간적 상황에 대처하여 영혼의 구원이 요청한다면 유연성을 발휘한다. 그래서 법조문도 국가법과는 달리 신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협조를 요청하는 표현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율법주의를 떠나 윤리, 도덕과 사랑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기술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교회 안의 법을 살펴보고 종합해 보면, 교회법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통제하고 제한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급변하는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현실적으로 설명하고 규정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더욱 쉽게 구원과 은총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법은 하나의 도구이며, 그것은 정의의 도구여야 한다. 자크 엘룰은 “법은 더 나아가 하느님을 위한 도구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다. 주변에 혹시라도 교회법을 잘못 오해한 한마디 말 때문에 상처받고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는 일이 없도록 - 특히 혼인법과 관련하여 - 잘 모르면 교구장 주교의 사법권을 위임받아 일하고 있는 각 교구의 법원에 문의하시기를 간곡히 청한다. * 김진화 마태오 - 전주교구 신부로 광주 가톨릭 대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01년 7월호, 김진화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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