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리서 DOCT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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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비자교리.....2006-09-01
작성자이철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08 조회수3,556 추천수0
 

다음은 교회의 특성과 모습에 대한 것입니다.

86. (문) 예수 그리스도, 교회 여럿을 세우시뇨?

   (답) 예수 다만 교회 하나만 세우시니라.

87. (문) 예수 친히 세우신 ‘참 교회’는 여러 교파 중에서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느뇨?

   (답) 네가지 특징으로 분별할 수 있느니, 곧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전하여 내려옴이니라.

  <2006-09-01>


지구상에는 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단체가 꽤 여러 곳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들을 수 있고 아는 것만 해도, 천주교, 그리스 정교회, 개신교, 성공회, 여호와의 증인, 통일교.....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많은 종류의 교회들의 뿌리는 가톨릭이요, 천주교입니다.  그러나 역시 인간의 생각이 들어가고 인간의 생각을 때로는 앞세우다보니, 그 발전과정에서 몇 가지로 분열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다양한 교회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갈라져 나간 형제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좁은 의미에서는 이단이라는 말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따라, 성령강림을 통하여 이루어진 교회는 열두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 공동체, 즉 가톨릭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역사가 흐르면서, 1054년에 당시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동방교회(=그리스 정교회)가 생깁니다.  그리고 1517년 독일의 비텐베르크에서 ‘가톨릭의 아우구스티노회 수사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를 기점으로 해서, ‘프로테스탄트 혹은 개신교’가 성립됩니다.


그리도 1608년에는 영국에서 영국황제의 혼인문제에 대하여 로마 가톨릭교회가 혼인에 대한 지침을 이야기하자, 거기에서부터 성공회가 갈라져 나갑니다. 


<여호와의 증인, Jehovah's Witness> : 1872년 찰스 테이즈 러셀이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 세운 '국제성서연구회'(International Bible Students Association)로 시작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은 1931년 러셀의 후임자 조셉 프랭클린 러더퍼드(판사 러더퍼드:1869~1942) 재임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여호와(→ 야훼)를 참된 하느님으로 재확언하고, 이 이름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특별한 신임을 받는 추종자들임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다른 교단과는 거의 또는 전혀 교류하지 않으며, 모든 세속 정부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통일교> : 1954년 문선명이 서울에서 창립한 통일교도 있습니다.  통일교의 신조는 "유일신인 창조주를 인간의 아버지로 믿으며 〈구약성서〉·〈신약성서〉를 경전으로 받들고, 독생자 예수를 인간의 구세주인 동시에 복귀된 선(善)의 조상으로 믿는다.  또한 예수가 한국에 재림할 것을 믿으며 인류는 재림하는 예수를 중심으로 하나의 대가족사회로 통일될 것을 믿는다.  끝으로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최종목표는 지상과 천상에서 악과 지옥을 없애고 선과 천국을 세우는 것이라고 믿는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는 하나로 출발했으나, 그 정신을 합당하게 지키고 살지 못했던 사람들의 행동과 삶 때문에 지금까지 구별한 많은 종파들이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은 가톨릭교회입니다.


87항은 가톨릭교회의 자아의식, 정체성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셨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니, 거룩한 단체이고, 전 세계에 골고루 퍼져있지만 그 움직임과 다스림에 갈림이 없어 보편적이고, 사도들을 모태로 해서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가 바로 가톨릭교회의 특성입니다.


교회와 신앙을 통한 구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88. (문) 천주교회 밖에서 구령할 수 있느뇨?

   (답) 자기 탓으로 천주교회 밖에 있는 자는 구령하지 못하느니라.

89. (문) 천주교회 밖에 있는 이는 누구뇨?

    (답) 천주교회 밖에 있는 이는 첫째, 영세하지 않은 자와  둘째, 천주교회의 신덕(信德)도리(道理) 하나라도 일부러 믿지 않는 열교인(裂敎人)과 셋째 천주교회의 최상통치권을 배척하는 이교인(離敎人)과 파문을 당한 신자들이니라.


인간의 입장을 앞세울 때는 고집이 앞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전에는 이 내용을 그대로 주장하여 신앙을 설명하는 많은 내용에 경직된 모습을 보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지난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이탈리아 로마의 바티칸에서 열렸던 교황님과 주교님들의 회의(=공의회)에서 이 내용은 조금 완화되었습니다.  세상을 향하여 교회의 입장을 설명하는 방법이 바뀌고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회의를 가리켜 공의회(公儀會)라고 하는데, 공의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내려주시는 은총을 인간이 함부로 제한할 수 없다는 뜻을 받아들여 요즘에는 그 내용을 강조하는 분량이 줄어들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했더라도 양심에 따라 올바르게 살았더라면, 그가 하느님의 자비를 받는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신학을 수용합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학문의 내용으로 정의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가르침을 자주 듣고, 그 가르침을 되새기고 실천하고 살았던 사람들이 하느님이 바라신 뜻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는 믿음이나 신학을 배제하지는 않았기에, 오늘 이 순간에도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는 시간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시간을 내서 그 힘에 함께 참여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제 2 절  모든 성인들의 통공(通功)

제 2 절에서 다루는 내용도 살아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믿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편리하게 살 수 있는 이유는 과거 언젠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만들어 놓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2절에서 말하는 성인들의 통공은 당연히 ‘신앙인들의 삶과 관련한 문제’로 알아들으시기 바랍니다.  통공이란 공(功)을 서로 나누어 갖는 것으로 알아들으시기 바랍니다. 이 내용은 우리가 외우는 사도신경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90. (문) 모든 성인의 통공이란 무엇이뇨?

   (답) 모든 성인의 통공이란, 세상과 연옥과 천당에 있는 모든 회우(會友)들이 가장 신비하게 서로 결합하고 또한 그리스도와 결합함으로써 공을 통함이니, 이는 마치 산 몸의 지체가 머리와 서로 결합함 같으니라.

91. (문) 이 결합의 효험은 어떠하뇨?

   (답) 이 결합의 효험은 회우들이 성교회의 은혜를 같이 받고, 기도와 선행으로 서로 도와줄 수 있음이니라.

92. (문) 대죄 있는 회우도 이 통공에 참여하느뇨?

   (답) 대죄 있는 회우는 온전히는 참여하지 못하느니, 온전히 참여하기에는 은총지위가 필요하니라.


사람이 돕는 일은 좋은 것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도움 받는 사람에게 서글픔을 느끼게 하더라도, 의도적으로 특별한 목적을 갖고 상대방을 힘겹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분명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돕는 문제는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에 적용되는 문제이고, 신앙에서는 그 차원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과 이 세상을 떠난 사람사이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공이 통할 수 있는 것도 한계는 있습니다.  교회의 개념 규정에 따라 설명한다면, 하느님의 자비와 축복을 거부하는 지옥의 경우는 제외합니다.

신앙인의 입장에서 우리가 서로 돕는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기도와 선행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 분을 위하여 특별한 기도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행위로 세상을 떠나신 분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입는 지위로 바뀌어졌을 때, 우리도 그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통공입니다.



제 3 절 사죄권(赦罪權)

3절에서 다루는 사죄권은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 내용은 사람이 지은 죄를 사람이 용서(容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93. (문) 천주교회에 죄를 사(赦)하는 권(權)이 있느뇨?

   (답) 있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그리스도께 받은 것이니라.

94. (문) 어떤 때에 죄를 사하느뇨?

   (답) 성세성사와 고해성사를 행할 때 죄를 사하느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맛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크게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거나 듣는 일이고, 다른 한 가지는 ‘용서한다’는 것을 체험하는 경우입니다.  같은 말을 사용하면서도 우리가 뜻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지만 이 두 가지만큼 사람으로 살기를 잘했다고 느끼게 해 줄만한 것은 없습니다.


신약성경 마태오 복음서 9,1-8(신약성경 18쪽)을 보면,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는 예수님의 기적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의 사회의 풍조는 병을 앓고 있던 것이 죄의 탓이었다고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의 병을 고쳐주시면서, 그가 죄를 지어서 그런 현상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이 그에게 드러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니 ‘병은 죄의 결과’라고 믿고 살았을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예수님을 향하여 항의합니다.  그러나 용서의 기쁨은 간절히 원했던 사람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하지 않으면 주어지지도 않겠지만, 그럴 때에는 용서라는 말도 그다지 의미 없는 말이 되고 맙니다.


천주교회에서 죄의 용서에 대한 행사는 94항의 내용대로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를 통해서 행사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을 통해서 허락하신 내용을 따라서 그렇게 합니다.  마태오 복음서 19,18에 보면,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있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판단을 하고 주장합니다만, 이것이 교회에서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교회에서 정한 방법과 규정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하겠습니다.  이 죄의 용서는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서 사죄권을 받은 사제들이 그것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을 향하여 행사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생각을 따라서 왔다갔다하는 방식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 9 장  인간의 죽음과 후세

사람은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죽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우스운 소리로 세상 3대 거짓말 가운데 한 가지로 ‘노인이 이제는 죽어야지!’한다는 말을 꼽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제가 설명하는 교리의 내용은 의학적인 지식이나, 철학적인 판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신앙에 대한 요소를 간략히 이야기하는 것뿐입니다. 


제 1 절  죽음    

95. (문) 사람의 죽음이란 무엇이뇨?

    (답) 영혼과 육신이 서로 갈림이니라.

96. (문)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도 죽느뇨?

    (답) 사람이 죽어도 그 영혼은 죽지 아니하여, 그 행실대로 상이나 벌을 받느니라.

97. (문)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육신은 어떻게 되느뇨?

    (답)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육신은 썩느니라.

98. (문) 우리는 죽음에 대하여 무엇을 가끔 생각할 것이뇨?

    (답) 죽음은 죄의 벌이요, 우리의 영복과 영벌이 죽는 순간에 달리고, 죽을 때가  일정치 않은 즉 항상 준비하고 있을 것을 생각할 것이니라.


죽음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설명입니다.  우리말 사전에는 죽음이라는 말을 ‘죽는 일.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을 이른다’고 설명합니다.  나름대로 설명하려고 애는 쓴 표현이겠지만, 이것만 가지고서는 무슨 뜻인지 그 뜻을 알아듣기가 좀 어렵습니다.  어떤 것이 없어지면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다는 것이지요.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잠시 접어두고, 눈에 보이는 육체를 다스리는 것을 가리켜 ‘정신’이라고 한다면, 그 정신이 떠나는 것을 죽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자체가 사람이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난자와 정자가 합쳐지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어느 곳에 정신이 위치하는지 우리가 알 수 있는 재간은 없습니다.  다만, 그 생명체가 이 세상에 나온 다음에 행동을 보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뿐입니다.


육체의 활동이 정지되면, 육체는 소멸의 길로 갑니다. 그러나 그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과학적인 발명품들이 오래도록 생명을 유지하고 그 발견자나 발명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과도 비교할 수 있는 말일 것입니다.  지금 쓰는 것에는 분명 다른 개발자가 있겠지만......<비행기는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만들었다...축음기는 에디슨이 만들었다.......전기도 에디슨이 만들었다.......우리가 쓰는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이 그 원형이다........> 그렇게 사람들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발명품들을 만든 사람들은 이 세상의 생명을 마치고 모두 떠났지만, 우리는 아직 그 일을 기억합니다.


이러한 인간사처럼, 세상에서 몸이 좋은 길로 가도록 영혼이 어떤 역할을 했느냐에 따라, 육신의 생명이 다한 다음에 그 상과 벌을 받는 것은 영혼의 몫이라고 교회는 이야기합니다.  영혼이 그 어디에 숨어있고, 자리를 잡고 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눈에 보이는 육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이나 영혼의 인도에 따라 사는 존재입니다. 


97번 항에 나오는 말은 좀 비극적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육신은 썩는다....’는 내용입니다.  모르는 바는 없지만, 이 말은 육신은 영원하지 않다는 표현입니다.  그와는 상대적인 위치에 있는 영혼은 썩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간다는 것이겠지요?  요한복음 6장의 후반부에는 예수님이 영혼과 육신의 관계를 설명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6,63)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합당한 자세는 정말로 ’육은 없어져야 마땅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만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로 알아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육은 없고, 영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며, 영만 있다고 한다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선행이든 혹은 악행이든 그것이 드러나는 방법은 몸으로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이야기는 그 내용을 알아듣는 우리의 입장은 상대적인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이 98항의 내용입니다.  죽음을 죄의 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 사람들의 기본 감정이기는 하지만, 다른 설명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세포의 힘이 다하여,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가 외부의 환경을 이길만한 힘이 다했기에 그 생명이 이제 끝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죽음을 삶의 완성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완성의 모습이 어떠할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한 설명은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성향을 갖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심어주신 영혼이 육체를 다스리는 사명을 다했을 때, 그 모습과 상태에 따라 영혼이 영원한 생명을 주실 하느님 곁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영원한 생명의 반대편인 영원한 죽음(=즉, 영벌)으로 갈 것이냐 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선택이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죽음을 죄의 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같은 사실을 바라보는 면을 달리해서, 우리가 세상살이를 통해서 얻은 여러 가지 결실에 대하여 이제 하느님에게서 합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입장이 조금 더 달라질까요? 



다음으로는 죽음 이후에 이어질 내용, 우리가 현실적으로는 볼 수 없지만, 신앙에 의한 입장을 살필 차례입니다.

제 2 절 사심판(私審判)    

 99. (문) 사람이 죽으면 그 상이나 벌을 누가 결정하시느뇨?

     (답) 사람이 죽으면 그 상이나 벌을 천주 심판으로써 결정하시느니라.

100. (문) 심판이 몇 가지 있느뇨?

     (답) 심판이 두 가지 있으니, 사심판(私審判)과 공심판(公審判)이니라.

101. (문) 사심판은 무엇이뇨?

     (답) 사심판은 사람이 죽어 육신을 떠난 영혼이 곧 천주 예수 앞에 혼자 받는 것이니라.

102. (문) 사심판의 판결은 어떠하뇨?

     (답) 사심판의 판결은 각각 다르니,

        1) 은총지위에 있어 아무 보속할 것이 없는 영혼은 바로 천당에 오르고.

        2) 대죄 중에 있는 영혼은 바로 지옥에 내리고,

        3) 소죄나 혹 보속할 죄벌이 남아있는 영혼은 연옥으로 가느니라.


심판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더더구나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심판의 대상이 된다면 더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일에도 마찬가지 이듯이 판단은 항상 필요한 법입니다.  이 심판의 결과는 육체를 이끌 임무를 맡았던 영혼에게 주어지는 상이나 벌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고 난 다음, 육체처럼 소멸의 길로 가지 않는 영혼은 하느님께로 올라가 영혼이 육체와 함께 있을 때에 그 육체를 제대로 다스렸는지, 육체와 더불어 좋은 결과를 맺으려고 노력했는지 그 결과에 따라 상이나 벌을 받는다는 것이 교회의 신앙입니다.  간단하게 자주 쓰는 말로 표현하면, 상선(上善)벌악(罰惡)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선벌악(償善罰惡)을 자세히 설명할 때 등장하는 것이 사람이 체험하지 못한 천당(=천국)과 지옥 그리고 연옥이라는 개념입니다.  어느 영혼에게 천국에 갈 수 있는지, 지옥으로 가야하는지 연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지 하는 것은 살아있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인간세상에서 흔히 통하는 생각대로 선악을 판단할 수 있고 그 선악이 영혼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그 영향에 따라서 우리가 체험하지 못한 천당과 지옥과 연옥으로 가야 할 길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사심판’이라는 말은, 각자가 세상의 삶을 마친 다음에 이루어지는 심판이라는 의미로 알아들으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각자에게 정해진 시간이 언제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심판의 결과는 천국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떨어지느냐, 아니면 천국으로 갈 수 있는 희망을 간직할 수 있는 연옥으로라도 삶에서 다하지 못한 선행을 보속하고, 세상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양보해줄 덕을 기다리는 삶을 살 것이냐 하는 것이 달라질 일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천당과 지옥과 연옥은 사람이 체험할 수 있는 수준을 넘는 교회에서 정한 개념입니다. 먼저 교회에서 정한 개념을 함께 읽겠습니다.    

103. (문) 천당은 무엇이뇨?

     (답) 천당은 천사와 성인들이 천주를 모시고 완전한 복락을 끝없이 누리는 곳이니라.

104. (문) 지옥(地獄)은 무엇이뇨?

     (답) 지옥은 마귀와 악인들이 혹독한 형벌을 끝없이 받는 곳이니라.

105. (문) 연옥은 무엇이뇨?

     (답) 연옥은 세상에서 보속을 다 못하고 떠난 영혼들이 천당에 들어가기까지 단련을 받는 곳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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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여러분이 보실 수 있는 비디오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교리시간에는 제가 따로 준비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랑의 시리즈 연작(連作)으로 폭스비디오에서 나온, 3개중의 한 가지인 what dreams may come (천국보다 아름다운)입니다.  1998년에 나온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는 명확하게 천당과 지옥, 연옥이라는 명확한 개념이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우리가 느낄 수는 있습니다.  내가 지상에 살면서 상상하던 좋고 아름다운 후세의 모습을 바로 천당으로 그립니다.  지옥과 연옥이라는 곳은 개인에게 주어진 공간도 좁고, 주변의 모든 색이 회색이나 검은색 일변도입니다.  이것이 체험하지 못한 곳을 표현한 한 가지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말하는 천국(天國,Paradise; the King-dom of Heaven)은 이 지상에서 영혼이 지냈던 삶의 결과에 따라, 육신과 분리된 영혼이 이제는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는 곳을 말합니다.  신앙인으로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장소가 바로 그곳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지옥(地獄,a hell; an inferno)은 신앙인으로 살았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과 함께 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남은 한 가지 연옥(煉獄,Purgatory)은 지금의 모습은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곳이라서 지옥과 비슷하지만, 남아있던 보속을 다 치루고 난다면 천당으로 옮겨갈 수 있는 희망을 주는 장소로 우리 신앙은 가르칩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함께 기도하는 ‘저승(=옛-고성소)’과는 개념이 다릅니다.  저승은 죽은 자들이 모여 있던 곳, 예수님의 부활을 간절하게 기다리던 선한 영혼들이 모여 있던 곳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 천국과 지옥, 그리고 연옥에 대해서 말씀은 드립니다만, 저도 거기에 다녀온 적은 없습니다.  1265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나 1321년 이탈리아 라벤나에서 세상을 떠난 단테라는 사람이 쓴 신곡(神曲,La divina commedia)이라는 작품도 있습니다.   이 신곡이라는 작품의 내용은 ‘인간의 속세 및 영원한 운명을 심오한 그리스도교적 시각으로 그리고 있는 것으로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 작품은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시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아주 포괄적인 차원에서 보면 지옥·연옥·천국을 여행하는 형식을 취한 우화(寓話)로 읽힐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Daum, 백과사전) 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천당의 몇 가지 모습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성경에는 ‘천당’이라는 용어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천당 또는 천국을 상징하는 묘사는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하느님께서 처음으로 창조하신 낙원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초창기의 인류가 그것을 잃어버린 후에, 실낙원(失樂園)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세상의 모든 동물과 식물이 얽혀있어도 아무런 위협과 해악이 되지 않았던 세상이 바로 낙원이요, 천당입니다. 


두 번째로 말씀드릴 수 있는 천국의 모습은 이사야 예언서 11장의 말씀입니다. 그 부분의 제목은 ‘메시아와 평화의 왕국’이라고 돼 있습니다.  이 부분은 신분에 따라 각자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지 않고,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잔인한 기운은 사라지고, 늑대와 새끼양, 표범과 숫염소, 새끼사자와 송아지, 암소와 곰, 젖먹이와 살모사가 서로 해가 되지 않고 어울리는 평화의 세상을 전해줍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나라이고, 이것이 우리가 만들어야 할 하느님의 나라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참조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성경에는 지옥의 모습도 나옵니다.  물론 지옥이라는 용어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루가 복음서 16장의 비유이야기(179쪽)입니다. 제목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지상에서 부귀영화를 다 누리며 다른 사람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살았던 부자가 하는 소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이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 할아버지는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천국과 지옥사이에는 통교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가려해도 건너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소리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협박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만, 천국이나 지옥, 그리고 연옥의 삶은 이 세상의 삶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정신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합당하게 살려고 애를 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사람이 드러내는 삶의 자세도 분명 다를 것입니다. 



다음은 한번 죽었던 육신의 부활과 공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육신의 부활에 관한 내용은 사도신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먼저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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