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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비자교리.....2006.7.7.
작성자이철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08 조회수3,977 추천수0
 

다음은 천사(天使)에 대한 내용입니다. 질문을 제가 일고, 함께 답을 읽는 방법으로 하겠습니다.                    

27. (문) 천주 창조하신 만물 중에 가장 존귀한 것은 무엇이뇨?

   (답) 만물 중에 가장 존귀한 것은 천사와 사람이니라.

28. (문) 천사는 무엇이뇨?

   (답) 천사는 지력(知力)과 의지(意志)를 가진 순전한 신(神)이니, 천주 저들을 은총 지위에 두사 은총을 잘 씀으로 영복을 받게 하고자 하시니라.

29. (문) 모든 천사들은 다 은총을 잘 썼느뇨?

   (답) 그렇지 아니하니, 그 중에 주의 뜻을 순(順)히 한 자는 상을 받아 천당(天堂)에서 천주를 모시는 천사들이 되고, 주의 뜻을 거역한 자는 벌을 받아 지옥에 빠져 마귀가 되니라.

30. (문) 천주 무슨 임무를 천사들에게 맡기시뇨?

   (답) 천주 여러 가지 임무를 천사들에게 맡기시는 중 특별히 사람 보호하는 임무를 맡기시니, 각 사람에게 날 때부터 수호(守護)천사 하나씩 정하여 주시느니라.

31. (문) 사람이 수호천사께 할 본분은 무엇이뇨?

   (답) 각 사람이 수호천사께 할 본분은 저를 경애하며 그 도움을 구하며 또한 그 잠잠히 타이름을 잘 들음이니라.

                      <2006-07-07>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인 천사에 대한 설명을 하는 순서입니다.  천사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중에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참으로 귀중한 대상입니다.  이 귀중한 대상인 천사에 인간이 버금가는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런 내용을 듣는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욕심과 잘못이 언제부터 들어왔는지 설명할 재간은 없습니다.  하느님이 만드신 천사들 가운데서도 인간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욕심이 있어 마귀가 탄생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욕심은 인생뿐 아니라 모든 것의 바탕을 파괴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충실히 전하고, 인간을 보호할 책무를 지닌 천사들이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갑니다. 


옛날 교리의 내용을 담고있는 것으로 ‘요리강령(要理綱領)’이라는 책<=내가 갖고 있는 것은 1956년판>이 있습니다.  이 책은 가톨릭 교회의 교리인 사도신경(司徒神經)과 칠성사, 그리고 천주십계를 설명하는 그림책입니다.  이 그림책의 내용 가운데 사람의 삶에 관한 심판(審判)의 항목에서 사람이 드러낸 삶의 결과에 따라 수호천사도 벌과 상을 받는 그림(57번 그림)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느님의 길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 인간이 죽은 다음에 악마의 소굴인 지옥으로 끌려가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 죽은 자의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질 때,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열심히(?) 뛰었던 천사는 그저 얼굴을 가리고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그림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을 아무리 헤치고 찾아보려고 해도 천사는 우리가 느낄 수 없습니다만, 지고(至高)한 영적 존재인 천사들이 우리들 주변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교회는 한가지 교리로 설명합니다.  


다음으로,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 그 힘의 원천인 악마에 대한 교리 내용입니다. 함께 읽죠. 

32. (문) 마귀는 세상에 나와 무엇을 하느뇨?

   (답) 마귀는 사람을 지옥에 빠트리려고 하여 항상 죄로 유인하느니라.

 


악마(惡魔)는 천사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눈에 보이지는 않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없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 그 힘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들의 교리설명에서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의 근원을 하느님이라고 ‘신앙고백’하는 입장에 대한 설명의 한가지입니다.  악이 선의 결핍이라는 소리는, 애초에 하느님께서 이 악을 만들지 않으셨다는 소리입니다.  이것은 우리 생활에서 일의 성공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 어느 사람도 실패하려고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기가 맞지 않고, 자금이 부족하고, 다른 사람의 적절한 도움을 받을 시기를 놓쳐서 하던 일이 좋은 결과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잘 돼야 할 것이 잘되지 않으니, 그곳에 실패가 자리잡는 것이죠.  악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로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악의 기원과 출현에 대한 이야기를 전설과 설화를 근거로 하여 말씀드린 일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리를 탐했던 천사가 악마의 괴수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도 그 누구도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없지만, 악의 힘 그 기원은 자신을 겸손하게 보지 아니하고 남 앞에서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일은 잘못된 길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무조건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것만이 세상 최고의 덕목은 아니겠지만, 분수를 모르고 행동하는 것도 또한 옳은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린이들을 위한 만화영화나 어른들을 위한 영화에서 표현되는 악의 세계나 그 모습은 흉측{흉악(=성질이 거칠고 사나움, 용모가 험상궂고 모짊)망측}하거나 어둡습니다. 그래야만 그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나쁜 것과 좋은 것을 구별하여 빨리 알아듣는다고 생각하는가 봅니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세계에 드러나는 ‘악의 모습이 영화나 소설에서 그리는 것처럼 그런 모습을 갖는가?’하고 묻는다면, ‘아니다’라는 것이 교회의 설명입니다.  악의 모습은 결코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은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확한 구별을 하기 힘들 정도로 선(善)으로 보이는 방법으로, 그리고 자기 합리화가 가능한 방법으로 등장합니다.  도둑질을 하면 누구나 감옥에 간다는 것을 안다면,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들키지 않고 잘 해서 성공한다면 불로소득을 얻을 수 있고, 힘들이지 않고 쉽게 재물을 얻거나 명예를 얻는다고 생각하기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몇 백억 원씩의 부정 대출을 해준 다음에 뒷거래로 들어오는 몇 백만 원 때문에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보곤 합니다.  이 사람들도 자기가 한 잘못된 행위가 들킬 거라고 생각했다면, 아마도 도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나라고 못할 일이 있나 라는 생각을 가지면 이미 그 사람은 악의 수렁에 발이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고, 다시 헤어나오려면 엄청난 노력과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최형락, 종교교육예화 1권. 439면에 나오는 이야기> 어느 날 마귀 네 부자(父子)가 모여서 신앙인(=信者)들을 유혹할 방법에 대해 토의하였습니다.  큰 아들 마귀가 먼저 제안했습니다. ‘세상에 하느님은 없다고 하자.’  그 말로 사람들을 유혹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마귀는 그것은 안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계시는데, 없다고 하면 안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둘째아들 마귀가 제안했습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자.  그런데 아버지 마귀는 이번에도 안된다고 했습니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인 것이 분명한데 아니라고 한다고 그게 무슨 영향이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셋째 아들 마귀가 다시 제안하기를, ‘하느님도 계시고,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그런 것들은 차차, 천천히 믿고 따라도 된다고 가르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버지 마귀도 다른 아들들 마귀도 모두 찬성하였다.  그래서 마귀가 마음 가운데 있는 사람은 ‘우선 선한 일을 하자고 해도 차차 하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연약한 인간에게 도전하는 악의 모습인 것입니다. 


<최형락, 종교교육예화 1권. 440면> 마귀들의 모임에서 대장이 나타나 각각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한 결과를 보고하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하였다.  첫 번째 부하가 말하기를 ‘나는 광야에 있는 맹수들을 풀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달려들게 하였는데, 지금 그자들의 백골은 모래 위에 버려져 있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두목은 ‘그것이 무슨 소용이냐, 그들의 영혼은 이미 구원을 얻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른 부하가 말하였다. ‘나는 돌풍을 몰아다가 그리스도교 사람들이 탄 배에 충돌시켰더니 그들이 빠져 죽었소’하였다.  이때도 역시 두목은 ‘그것도 아무 소용이 없다 영혼은 이미 다 구원을 얻었느니라’  다음으로 등장한 부하는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 한 사람을 작 추켜 세워서, 냉담(=신앙에 소홀)하도록 십 년을 노력하여 성공하였소.’  그러자, 두목은 매우 기뻐하였다.



5. 사  람 (33항-43항)


다음은 사람에 대한 신앙의 진리(=교리)를 찾아보는 순서입니다.  구약성경 시편 8,2-10에 보면, 인간에 대한 찬사가 나옵니다.  

<<{ 2  주 저희의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 하늘 위에 당신의 엄위를 세우셨습니다.  3  당신의 적들을 물리치시고 대항하는 자와 항거하는 자를 멸하시려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당신께서는 요새를 지으셨습니다.  4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5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주십니까?  6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7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8  저 모든 양 떼와 소 떼 들짐승들하며  9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 물속 길을 다니는 것들입니다.  10  주 저희의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 }>>


이러한 찬사를 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에 대해서 교회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그 내용을 살펴볼 순서입니다. 

먼저 사람을 이루는 요소에 대한 것입니다. 33항과 34항의 내용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33. (문) 사람은 무엇이뇨?

   (답) 사람은 영혼과 육신으로 결합된 자니라.

34. (문) 영혼은 무엇이뇨?

   (답) 영혼은 신령하여 불사불멸하는 체(體)니, 육신과 합하여 그 생명이 되느니라.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몸과 마음(혹은 정신)으로 구성된 것을 사람이라 하기도 하고, 우리 신앙의 진리(=교리)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은 영혼[(국어사전)=육체와 구별되어 육체에 머물면서 마음의 작용을 맡고 생명을 부여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비물질적 실체]과 육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관으로 감지한 것만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으면 있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진리에서는 사람을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은 합니다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믿고 따른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두 가지 요소가 하나로 합쳐져 있을 때, 우리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요소가 분리되면 죽는 것입니다. 


사람의 구성요소로 등장하는 육신은 이 세상에서 움직이고 그 기능을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다른 구성요소인 영혼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세상에 사는 눈에 보이는 육체(=육신)가 저 높은 곳, 하늘과 연결되는 매개체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영적인 존재이고, 세상에서 움직이는 낮춰부르려고 하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단백질 덩어리인 사람의 몸이 올바른 결실을 맺도록 이끄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지는 않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존재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사람의 창조에 대한 것이 구약성경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믿음의 고백으로 나옵니다.  눈에 보이는 인간 육신의 재료는 ‘흙’입니다.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기 2,7)고 적습니다.  이것이 신앙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기원입니다.  이 내용은 과학에서 말하는 사실성에 근거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몸에 대해서 과학적인 잣대로 아무리 많이 찧고 까불러도 흙이라든가, 흙의 먼지라든가 하는 요소는 나오지 않습니다.  굳이 성분분석을 하여 흙의 원소와 비슷한 것을 찾아낼 수 있을 지는 모릅니다.


신앙에서 이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지어진 것(창세기 1,27=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이라고 적습니다.  바로 이 사실, 이러한 믿음에 인간이 다른 대상이나 동물들보다 귀중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의미가 있고, 당연한 주장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흙에서 출발한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그 생명이 다하면 죽으면 흙에 묻는지도 모릅니다. 출발점으로 따지면, 흙인데 서로 다른 가치와 평가를 받는 것은 보이는 인간에 하느님의 뜻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내용으로 나오는 영혼은 신앙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하느님의 특징을 담고 있는 것은 영혼으로, 육신의 생명이 다하더라도 그 존재가 소멸하지 않는 ‘불사불멸, 영원한 존재’가 바로 영혼입니다.  훗날 다룰 내용입니다만, 사람의 몸이 세상살이 결과를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따라, 그 영혼에 대한 하느님의 판단도 달라진다고 교회는 설명합니다.

35. (문) 인류의 으뜸 조상은 누구뇨?

   (답) 인류의 으뜸 조상은 ‘아담’과 ‘하와’니, 천주 저들을 낙원에 두사, 주의 계명을 잘 지킴으로 죽지 않고 바로 천당에 오르게 하고자 하시니라.

36. (문) 천주 원조(元祖) 두 사람을 어떻게 내시뇨?

   (답) 천주 아담의 육신은 진흙으로 만드시고 하와의 육신은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만드시고 그 둘의 영혼은 아무 재료도 없이 창조하여 주시니라.

37. (문) 성경에 천주 사람을 당신 모상대로 내셨다하니 이는 무슨 뜻이뇨?

   (답) 이는 천주 사람에게 다만 본성에 적합한 지력과 자유와 의지를 주실 뿐 아니라, 또한 과성(過性=조력성총)은혜와 초성(超性=상존성총)은혜로 저를 아름답게 꾸미셨다는 뜻이니라.


35항에서 38항은 구약성경의 내용을 따라가는 신앙의 내용,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제대로 지켜지지 아니한 모습이기도 하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다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지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내용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내용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록인 성경에 나오는 바에 따르면, 최초의 인간이 살던 곳을 ‘에덴 동산’(창세기 2,8)이라고 합니다. 역사가 흐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낙원(樂園)을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아직 그곳을 찾았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여러분도 찾지 마시라는 이야깁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지금의 이란의 어느 지방일 것입니다.


이렇게 에덴지방에 살던 최초의 인간은 흙에서 나왔습니다. 처음 인간은 남자요, ‘아담(ADAM)’이라고 합니다.  말의 어원을 따르면, 사람과 흙이라는 말은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인간은 단순히 흙이 변형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흙과는 전혀 다른 물질이요, 물체이고 또 생명체입니다.  이런 설명하는 방법을 가리켜서 신학에서는 ‘실체변화(實體變化)’라는 용어를 씁니다.  출발점을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형태를 가졌을 때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훗날 언급하게 될 예수님의 몸과 피인 성체와 성혈에 설명할 때도 같은 용어가 사용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갈빗대의 개수가 차이 난다고 합니다. 제가 여성의 갈빗대를 세 본 적은 없으니,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원인은 위 39항의 응답에 나오는 것처럼, 여인의 탄생은 남자의 갈빗대 뼈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이 말은 과학적인 사실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고, 세상에서 큰소리로 호령하는 것은 남자이지만, 여성도 같은 정도의 중요성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있어서 열등한 존재도 홀대받을 수 있는 존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장이 뛰어야만 참으로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하듯이 그 생명을 지켜주는 갈빗대도 같은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이고, 여성은 그 역할을 하는 갈빗대를 근거로 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과학적인 사실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자체로써 귀중하다는 사실을 하느님의 업적을 통하여 우리가 인정하고 그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模像: 모형의 상, 모방하여 만든 상)대로 태어났다고 신앙은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틀로 삼아서 그 모습을 우리가 간직하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모상(模像)을 쉬운 말로 바꾸면, ‘흉내’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겉모양으로 같거나 똑같이 보이는 것을 우리가 ‘모상’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과 속성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우리들 각자는 하느님의 고귀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귀중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마찬가지로 귀중한 대우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말이 하느님의 모상을 간직했다는 말의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각자 자신은 귀중하죠. 속된 말로 먹는 분량으로 생각하면 동물보다 훨씬 못한 가치를 지닌 것이 인간입니다.  몇 몇 가지의 동물들이 가진 특성을 비교해봐도 세상의 모든 동물들과 견주어서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갖지 못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가리켜서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 요소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특성을, 하느님의 형상을 우리가 나누어 가졌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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