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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비자교리......2006.6.23.
작성자이철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8-13 조회수4,420 추천수0
 

2006-06-23

15. 천주[하느님]께서는 전지(全知)하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전지하시어 모르시는 것이 없으시고, 사람의 은밀한 생각까지 다 아십니다.

하느님의 속성(屬性)을 질문하는 두 번째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지식의 한계를 넘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전지하다’고 표현합니다.  ‘앎의 원천’이요, ‘앎 그 자체’라는 말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사람은 양심에 꺼리는 일을 하면 자신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뛴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중국의 임금 현제(玄帝)의 수훈(垂訓)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人間私語天聞若雷, 暗室欺心神目如電(사람들의 사사로운 비밀스러운 말도 하늘은 우레소리처럼 크게 듣고, 캄캄한 방에서 자기 양심을 속이는 것도 신의 눈에는 번갯불처럼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고, 지금 다루는 개념으로서의 하느님을 말하기 전에 있었던 이 말은 하느님의 전지하신 특성을 잘 표현한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전지(全知)’의 개념에는 ‘과거에 있었던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 아시며, 장차 태어날 사람들이 자기 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지도 다 안다는 의미’도 포함하며, ‘이러저러한 조건에서는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지 아는 것도 포함’합니다.


이런 이야기1)를 하나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학생이 자기 어머니께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옥갈지 천국 갈지 아실 것이고 또 우리는 꼭 그대로 갈 것이 틀림없겠지요?” -- “물론이지” --“그렇다면 저 주일 미사 참례를 그만두고 소풍이나 가겠어요.  하느님께서 우리가 지옥에 가리라는 것을 아신다면 아무리 주일 미사를 열심히 해도 우리는 결국 지옥에 갈 것이니 쓸데없는 짓이고, 우리가 천국에 갈 줄 아신다면 주일미사 참례를 하지 않아도 결국 천국에 갈 것이니 주일 미사는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 “……” -- 학생이 종일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놀고서 저녁때 피곤하여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저녁 준비도 안하고 계셨다. 이유를 묻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하느님께서 우리가 굶어 죽을 것으로 아신다면 우리가 아무리 저녁밥을 잘해 먹어도 결국 우리는 굶어 죽을 것이니 필요 없을 것이고, 굶어죽지 않을 것으로 아신다면 우리가 저녁밥을 먹지 않아도 결국 무사할 것이니 또한 필요 없는 것이다” -- 학생은 머리를 긁적이며 이렇게 말했다. -- “어머니 잘 알았습니다. 다음부터는 미사 참례 잘하겠으니 어서 저녁밥을 해주세요” 


사람은 양심을 속이기도 하고, 재주껏 자기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에서 뛰어나고 독특한 일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드러내는 그 능력을 무시하거나 소홀이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람이 뛰어난 일을 해서 자기 영광을 구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남기더라도 그 한계를 올바로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이 오감으로는 먼저 접근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16. 천주[하느님]께서는 무한(無限)하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무한하시어 유한(有限)한 모든 곳에 다 계시고도 무한히 남아 계십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묻는 질문입니다.  이 세상에 일정한 공간을 차지할 수밖에 없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 묻는 질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하느님의 존재를 묻는 경우는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나 어려움을 당한다고 생각할 때, 도대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기에 내가 이런 어려움을 당해도 모른 체 하고 있는가를 묻는 경우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이 어디에 계신지 우리가 장소나 시간을 제한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하느님을 출발점으로 해서 이 세상에 등장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내가 이러저러하게 모든 것을 규정하고 제한하더라도 불가능한 것은 있기 마련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성서 시편 139,7-10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7  당신 얼을 피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8  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 

9  제가 새벽놀의 날개를 달아 바다 맨 끝에 자리 잡는다해도 

10  거기에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잡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감각의 대상이 되지 않는 신(神)이십니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하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나오는 장소 언급은, 하늘나라에 우리가 들어가야만 하느님을 뵙게 될 수 있다는 우리의 한계와 입장을 설명하는 말로 알아들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항상 은총[-->상존(常存)성총(聖寵)] 가운데 우리가 살수 있다면, 하느님은 우리안에 계시게 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17. 천주[하느님]께서는 공의(公義)하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공의하시어 선(善)한 이를 상주시고, 악(惡)한 이를 벌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25,31-46이야기 참조할 것


18. 천주[하느님]께서는 전능(全能)하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전능하시어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것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19. 천주[하느님]께서는 전선(善)하십니까? : <답> 천주께서는 무한히 선하시어, 통회하는 자를 용서하시고 당신께 청하는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여기 8가지의 요소는 인간이 신앙으로 고백하는 하느님의 속성입니다.  속성이라는 말 역시도 우리가 어느 대상을 분석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겠지만, 여기서는 체험이라는 단계를 생략하고 그렇게 표현합니다.  하느님은 세상 만물을 있게 하신 원동자(原動者)이며,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가톨릭 기도의 ‘사도신경’의 첫 부분에서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이 하느님의 다른 속성으로 언급하는 것이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①전지, ②무한, ③공의, ④전능, ⑤전선하다는 것입니다. 유한한 길이로 정해진 기간 밖에는 살 수 없는 인간이 하느님께 적용되는 이러한 속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에서 알아채지 못하는 것도 이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또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서울-부산의 거리를 보름이나 한 달씩 걸려야 이동할 수 있다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동차, 기차, 비행기를 이용하는 방법에 따라 그 소요시간이 다르고, 전화라는 것을 이용하면 지구 반대편의 거리라고 하더라도 시간의 차이를 그다지 많이 느끼지 않고도 통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받아들이고 공경하는 마음을 갖겠다고 하는 것은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람의 한계를 알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의 한계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하느님을 찾는 것은 누구나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할 일입니다.


   20. 전선하신 천주께서 이 세상 환난병고(患難病苦)를 막지 않으심은 어쩜이뇨?   : <답: 이는 세상 사람들에게 죄를 보속하며 공을 세울 기회를 주시려 하심이니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질만한 내용이 20번의 내용이요, 응답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문제는 그 누구도 속시원한 대답을 줄 수 있는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교회의 가르침, 교회가 가르치려고 하는대로 믿고 따르는 내용을 말씀드린다고 해도, 모두 같은 자세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 대상에 따라 받아들이는 자세가 다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다리가 부러진 고통과 내 손가락 밑에 들어간 나뭇가시가 주는 고통의 크기는 어떤 것이 더 크겠습니까?  고통의 절대적인 크기를 묻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받아들이는 심리적인 크기를 묻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묻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세월을 두고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일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절대적인 진리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금 질문으로 여러분에게 묻고 응답하는 내용은 절대적인 축에 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통에 대한 문제는 사람을 참으로 힘겹게 합니다.  다른 사람은 건강한데 나는 왜 그렇지 못할까?  세상에 못된 짓은 골라서 다 하는 사람은 멀쩡하고, 착하고 좋은 일을 골라서 하는 나는 왜 이렇게 지지리 복도 없이 고생해야 할까?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느끼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그 대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한번 얻은 대답을 쉽사리 인정하지도 않겠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주는 대답은 20번에 나와 있는 답입니다.  맘에 들지는 않지요?  왜 우리는 오로지 죄를 없애고 그 죗값을 값기 위해서만 살아야 할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의하고 따진다고 해도,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대답을 얻을 수 있는 재간은 없습니다.  내가 태어난 가정의 부모님은 다른 부모님과 왜 가진 능력이 다를까....하는 것과도 비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불만을 가져도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 사람의 마음 성향을 일찍부터 꿰뚫어보았던 입장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대답이 이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손으로 빚은 진흙에서 출발했고, 그렇게 시작된 사람의 삶이 연약하게도 다른 피조물(=즉, 뱀)의 꾐에 빠져서 하느님이 명하신 선의 길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멀어지고 비뚤어지는 삶의 태도에서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한 입장이었다고 한다면, 우리들 각자가 구체적으로 그 상황에 협조하거나 참여한 것은 아니더라도, 교회에서 설명하는 삶의 방법을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는 일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응답을 하기는 합니다만, 무책임하게 사람들들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습니다. 

  21. 천주 인자하시뇨?  :  <답 > 천주 인자하시니 자기 죄를 통회하는 자는 용서하시느니라


사람이 겪을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속시원한 대답을 얻을 수는 없지만, 교회에서 신앙으로 구별하는 하느님의 속성은 ‘인자하신 분’입니다.  그 인자는 사람이 자기 삶을 돌이킬 때에 체험할 수 있는 선물이기도 합니다.  


<열왕기서에 나오는 엘리야와 아합이야기. - 못된 짓은 골라서 하지만, 국가의 멸망을 예고하면서도, 통회하는 아합을 보고, 하느님은 그의 아들대에 가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에제키엘 예언서 18장-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는데, 그 아들의 이가 시릴 이유는 없다....>


<20항 관련 내용 추가-예전에 작성된 것에서 옮겨옴>


하느님은 앎의 근원, 모든 능력의 근원, 모든 선의 근원이라고 신앙에서는 고백하는데, 어찌하여 그 하느님이 만들었다고 하는 세상, 그 하느님이 다스린다고 하는 세상, 거기에 그 하느님의 특성이나 속성과는 충돌하는 모습이 횡행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20항과 관계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감정을 앞세우는 사람들은 이 질문에 덧붙이기도 합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태어난 아이가 왜 몹쓸 불치병에 걸린 채 태어나는지, 왜 전쟁은 일어나서 아무런 원인 제공도 하지 않은 어린아이와 여성들과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하는지 따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중요한 본질적인 응답 한가지를 빠트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아니라면, 이 질문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감정이 앞서서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지성이 설명하고 싶지 않은 탓이고, 남을 단죄(斷罪)하던 기세(氣勢)등등한 칼날을 자신의 책임을 인정해야 하는 쪽에서는 슬그머니 내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탓은 모두 조상에게 있는 것이며, 나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주장이 주류를 이룹니다.    


교회의 입장은 이러합니다.  적어도 예비자 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세상일에 이런 고통과 고난의 모습이 함께 하게 된 원인은 ‘인간에게 주어졌던 자유의지의 남용’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자유의지를 남용한 적이 없다고 하고 싶은 마음과 생각은 굴뚝같을 것입니다.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는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다른 한가지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는 공동체입니다.  나는 다 잘하고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행한 일들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공동체에 주어진 운명입니다.  ‘강(江)의 상류(上流)’에 사는 사람이 오물을 내버리면, 강의 하류에 사는 사람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하더라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싫다고 한다면, 강을 오염시키는 상류에 사는 사람보다 더 상류로 올라가서 사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피해 올라간다고 해서 세상에서 겪는 모든 문제로부터 초탈(超脫)할 수 있는가하고 묻는다면, 그것은 또한 절대로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난 다음에 그 삶의 질곡(桎梏)에서 효과적으로 벗어날 일을 찾는 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세상에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을 통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교회는 <현세의 온갖 고통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죄악을 보속하고  공덕(功德)을 세우게 하시는 것>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들을 정의한다고 해서 세상의 어려움에 ‘나 몰라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가오는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피해야 합니다. 물론 없앨 수 있으려면 자신과 남을 위해서 없애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값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치뤄야 한다면, 무조건 피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는 따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도신경의 말미에 보면,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가톨릭 교회의 특성을 한가지 더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지상에서 아쉬움 없이 살려면 어느 정도는 재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내가 번 것이라고 해서 내가 살아있는 동안 모두 쓰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흘러갈 것도 있고, 자녀들에게 물려줄 것도 있습니다.  내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면서 쌓는 덕행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또한 교회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의 문제가 인간 세상에 싹튼 것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것입니다.  ‘악(惡)’의 존재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선(善)의 결핍’이라고 합니다. 물론 악이라고 하는 것은 형태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선이라고 하는 것에도 같은 주장을 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형태가 나타나지 않으니 그것을 없애거나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도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악에 대한 문제는 연약한 인간성에 있다고 기록합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은 하느님이 창조해 놓으신 세상을 올바로 관리해야 하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인간의 어느 구석에 욕심과 자만심, 그리고 남들보다 더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이 숨어있었는지, 피조물의 하나인 인간보다 훨씬 더 못하다고 할 만한 ‘뱀’으로 등장하는 힘에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율권, 자유의지를 남용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교회의 입장입니다.  이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인간은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는 되었지만 차라리 몰랐던 것보다 좋지 않은 결실을 거둘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악은 점차로 퍼져갑니다.  선이 사라진 자리가 악이라고 했으니, 악의 힘은 커져 갈 수밖에 없죠. 


우리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도 같은 내용일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해주신 하느님의 명령과 훈령을 소홀히 내 맘대로 해석했으니, 형제가 서로 죽게 하는 것은 오히려 그 정도가 약한 범죄에 해당하는 것이고, 요즘 세상에 일어나는 범죄들, 다른 사람들을 상하게 하고 죽게 하고, 다른 사람을 향하여 사기치는 일은 오히려 자신에게 부담감이 덜한 죄악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전통적인 이야기에서 악의 힘이 탄생한 것은 ‘하느님의 자리를 탐한 천사’의 행위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천사의 이름은 ‘루치펠<Luchiper> 또는 루시퍼<Lucifer> 또는 루이스 사이퍼<Louis Saipher>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 역시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서 악의 힘을 줄이는 방법은, 악을 극복할 수 있는 선을 더욱 많이 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궁창 물이 지저분하다고 해서 우리가 어디론가 퍼내어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영향을 어디선가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숟가락, 한 숟가락씩 우리가 맑은 물을 옮겨 넣고, 그렇게 해서 함께 머물고 있는 바탕이 맑아지게 만드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그것이 고통을 통하여 인간이 죄악을 보속하고  공덕을 세우게 하려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20항의 의미입니다.  죄악은 어느 누군가 한 사람이 없애버리고 싶다고 해서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1) 이 이야기는 ‘상해 천주교요리’ 1권의 65-66쪽에 나와있는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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