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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 인쇄

독일어 Das Heilige

   [성서학적 고찰] 1. 구약에서 : 우리말‘거룩함’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카도쉬(qados)이다. 카도쉬의 어근 qds는 본래 ‘분리‘, ‘격리’의 뜻을 지닌다. 같은 셈족어인 베니게어(Phenician)에서도 qds는 ‘거룩함’을 뜻하며 거기서 파생된 mqds는 ‘성소’를 가리킨다. 아시리아어(Assyrian) Kadasu는 ‘정결’을 Kadistu는 이스타르 신에게 성전노예(hierodule)를 가리킨다. 아랍어와 이디오피아에서도 qds는 히브리어와 같은 뜻을 지닌다. 시라아어 qades는 ‘신에게 바쳐진’, ‘인정하게 된’을 뜻한다. 여기서 파생된 아랍어 케다샤(qedasa)는 ‘귀고리’, 혹은 ‘코고리’를 뜻한다. 본래 그러한 ‘고리’는 신성한 것이었다. 구약에서 ‘거룩’함이라고 하는 속성이 부여되거나 관련되어 언급된 대상은 주로 하느님, 시간, 사람, 장소 및 기타 사물들이다.

   ① 하느님의 거룩함 : 거룩함이란 개념은 일차적으로 하느님과의 관련 속에서 언급되고 있다. 사람과는 구별되고, 사람과는 격리되어 있는 분, 그러기에 거룩한 분으로 언급되어 있다.

   ㉮ 현현(theophany)과 관련된 이사야는 우치야 왕이 죽던 해에 야훼께서 드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다. 야훼보좌 주변에서 스랍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외친 내용이 바로 야훼의 거룩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이사 6:3). 여기에 대한 이사야의 응답,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구나. 입들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여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이사 6:5)에서, 즉 하느님을 뵙는 자는 죽음을 각오한다는 생각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에 대한 예언자의 인식을 본다. 하느님께 대한 묘사로서의 ‘거룩한 분’은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라는 표현과 평행을 이루어 쓰이기도 한다(시편 22:3, 이사 57:15). ‘거룩함’과 ‘두려움’(nora)이 곧 하느님의 이름이다(시편 99:3, 111:9).

   ㉯ 인간의 결함, 분순 및 죄와는 완전히 격리된, E문서 기자는 인간이 지닌 결함, 불손 및 죄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섬길 수 없게까지 한다고 말한다(여호 24:19). 즉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하느님의 거룩과 인간의 죄 사이에는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양자를 관계 맺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거룩한 분의 임재 앞에는 아무(것)도 거룩하게 되지 아니한 상태로는 나타날 수 없다(1사무 6:20). 거룩한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것은 그 분과 관계를 가질 사람이 거룩해지는 길 뿐이다(레위 11:44-45, 19:2, 20:26, 21:8). “나 야훼 너의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

   ㉰ 하느님의 칭호. 주로 이사야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gedos yisrael)’으로 불린다(이사 1:4, 5:19-24, 10:20, 12:6, 17:7, 29:19, 30:11·12·15, 31:1). 제2 이사야에게서도 이런 표현은 계속 나타난다(이사 41:14·16·20, 43:3·14, 30:11, 47:4, 48:7, 54:5, 55:5, 60:9·14). 예레미야(50:29, 51:5)와 시편(71:22, 78:41, 89:19)에서도 이런 표현을 볼 수 있다. 달리, ‘야곱의 거룩하신 이(qedos yaaqob)’(이사 29:33), ‘그(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qedoso)’(이사 10:17, 49:7), ‘너희의 거룩한 자(qedosekem)’(이사 43:15) 등으로도 나온다.

   ② 시간의 거룩함 : ‘거룩함’의 뜻을 지닌 히브리어 카도쉬가 구약 안에서 적용된 최초의 예가 ‘시간의 거룩’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 쉬시고 이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창세 2:3). 안식의 ‘시간’(안식일)이 복받고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창조에 관한 기록에는 공간 속의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거룩하다’는 특성을 부여한 것으로 언급된 것이 없다. 다만 ‘거룩하다’는 최초의 적용이 ‘시간의 거룩함’, 그 중에서도 노동시간이 아닌 쉬는 시간의 거룩함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간에 대한 성화(聖化)는 느헤미먀에게서도 볼 수 있다(느헤 8:9·10·11). 이사야도 안식일을 ‘야훼의 거룩한 날’(이사 58:13)이라고 한다.

   ③ 사람의 거룩함 : 시간 다음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것은 개인으로서나 단체로서의 사람이다.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나라, 거룩한 내백성이 되리라”(출애 19:6). 백성 전체가, 한 나라 전체가 거룩하다는 속성을 부여받는다(신명 7:6, 14:2·21, 26:19, 28:9). 이것은 다른 나라, 다른 백성과의 구별이다. 백성 사이에서도 사제들(레위 21:7·8, 민수 16:5·7), 아론(시편 106:16), 레위인들(2역대 35:3), 예언자(2열왕 4:9), 나실인들(민수 6:5·8)이 또 달리 거룩하게 구별된다.

   ④ 장소와 사물의 거룩함 : 거룩한 장소로서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성막과 그 안의 기구들이다.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필하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단과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에”(민수 7:1) 성막의 신성함은 오경의 여려 곳에 언급되어 있다(출애 29:31, 레위 6:9·19·20, 7:6, 10:13, 16:24). 그밖에 예루살렘(전도 8:10), 사제들의 거실들(에제 42:13), 이스라엘 진(신명 23:15)도 거룩한 곳으로 여겨졌다. 이 밖에도 거룩한 물(민수 5:17), 거룩한 천사(시편 89:6·8, 욥기 5:1, 15:15, 즈가 14:5, 다니 8:13) 등에 관한 언급들도 보인다.

   이상에서 보듯이 거룩한 시간, 사람, 장소, 사물등은 모두 ‘하느님’과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이 거룩한 것이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속성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본질이라고까지 볼 수 있다.

   2. 신약에서 : 신약에 와서도 거룩함의 개념, 그것이 갖는 하느님과의 본질적 관계 등에는 변함이 없다. 신약에서 거룩함을 뜻하는 하기오스(hagios)는 그 자체의 그리스어적 의미에서 고찰되기보다는 히브리어 카도쉬의 번역이므로, 신약의 하기오스 이해를 위해서도 구약의 카도쉬 이해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한다. ① 하느님의 거룩함 : 스랍들이 하느님의 거룩함을 선포한 것을 구약(이사 6:3)에서 볼 수 있듯이 네 생물이 하느님의 거룩함을 날마다 선포하고 있는 것을 신약(계시 4:8)에서도 볼 수 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시로다!”

   거룩함과 전능이 결합되어 하느님의 본성을 나타내고 있다. 요한 묵시록에서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에서도 우리는 예수께서 ‘거룩하신 아버지(pater hagie)(요한 17:11)라는 말로 하느님의 본질적인 성격을 묘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베드로도 그의 첫째 편지에서 레위기 14:44-45, 19:2, 20:7 등에 근거하여 하느님께서 거룩하시어 하느님의 자녀인 신도들도 모든 행위에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을 권면하고 있다(1베드 1:14-15). ‘주의 기도’에서도 기도하는 이는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받도록(hagiastheto to onomasou)’ 간구한다(마태 6:9; 루가 11:12). 여기서 이름이란 하느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인격이다(마태 28:19 참조).

   ②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 : 하기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예는 마태 1:24, 루가 1:35, 4:34, 요한 6:69, 1요한 2:20, 묵시 3:7, 사도 3:14, 4:27·30 등에 나타나 있다. 그분의 출생 묘사에서부터 우리는 그의 어머니에게 ‘성령(pneuma harion)’이 오셔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ounamis uphiotou)이 그를 감싸 ‘거룩한 아기(to gennomenon hagion)’ 곧 ‘하느님의 아들(uios theou)을 낳을 것을 예고 하였다(루가 1:35).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기원을 말한다.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본질은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오심’(katabenai to pneuma to hagion)과 함께 한 번 더 확인된다(루가 3:22). ‘더러운 마귀가 들린 한 사람’(anthropos en pneumati akatharto)이 예수를 알아 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o hagios tou theou)이라고 고백한다(루가 4:34).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마귀의 왕국을 파멸시키실 자다. 같은 고백을 이번에도 베드로신앙고백에서도 들을 수 있다(요한 6:69).

   사도행전에서도 예수에게 하느님의 ‘거룩한 종(ho hagios pais)’(사도 3:14; 4:27·30)이라는 표현을 본다. 여기에는 제2 이사야의 ‘야훼의 종’(ebed Yahweh)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예수는 하느님의 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희생당하는 ‘거룩한’ 희생 제물이다(1베드 1:18-19).

   ③ 성령의 거룩함 : 성령(pneuma hagion) 혹은 영(pneuma)의 거룩함은 하느님의 거룩함 및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 뿌리는 구약의 ‘거룩한 영’(ruah haqqodes)(이사 63:10-11, 시편 51:11)이다. 복음서 기자들 중에서는 루가가 정관사 없이 pneuma hagion(루가 1:15·35·41·67, 2:25, 3:16, 4:1, 11:13) 혹은 정관사와 함께 to pneuma to hagion(루가 2:26, 3:22, 10:21, 12:10·12)이라는 용어를 즐겨 쓴다. 신약에 와서 성령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신성한 성분을 함께 갖는다.

   ④ 교회의 거룩함 : 일찍부터 초기 예루살렘 신앙공동체는 ‘거룩한 종’(hagios pais)이 세운 것이다(사도 4:27·30). 그 공동체는 곧 ‘성령의 전’(eplesthesan hapantes touagion pneumatos, 성령으로 가득 찬)이었다(사도 4:31). 그리하여 하느님의 새 백성이 탄생하였다(히브 13:12 이하 참고). 이것이 교회다. 교회의 거룩의 근거는 그리스도 희생이 피다.

   “그리스도께서 물로 씻는 예식과 말씀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당신의 몸을 바치셨읍니다.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티나 주름이나 그밖의 어떤 추한 점도 없이 거룩하고 흠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앞에 서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에페 5:26-27).

   그리고 이 교회에 속한 신도는 ‘거룩한 백성’이다(1고린 1:2). 유대 그리스도 교인들과 이방 그리스도 교인들의 구별도 없어진다. 모든 신도가 다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된다(에페 2:22). 이것은 ‘신도들의 거룩함’이라는 개념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閔泳珍)

   [참고문헌] F. Brown, S.R. Driver and C.A. Briggs, in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Oxford 1972, pp.872~3 / W.F. Arndt and F.W. Gingrich, 'hagios' in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Chicago 1974, pp.9~10 / G. Kittel, trans. by G.W. Bromiley, 'hagios' 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I, Grand Rapis, 1968, pp.88~110 / J. Muilenburg, ‘Holiness’ in The Interpretes’s Dictionary of the Bible, vol. 2, ed. by G.A. Buttrick, New York 1962, pp.88~110.

   [교회 · 종교학적 고찰] ‘거룩한 것’(Das Heilige)이란 종교학적으로 볼 때 종교에 있어서 그 토대로 이루고 있다. 종교란 이 ‘거룩한 것’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종교가 된다. ‘거룩한 것’은 ‘속된 것’(Das Profane)에 반대되거나 대립되어 있다. 따라서 ‘거룩한 것’은 ‘속된 것’의 영역과는 다른 그리고 이와는 명백히 구별되는 그 고요한 영역을 갖는다. 그러나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룩한 것’은 그 자체로서 드러나지 않는다. ‘거룩한 것’은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속된 것’을 통해서만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나타낸다.

   1. ‘거룩한 것’은 ‘속된 것’의 영역과 명백히 구별되는 하나의 고유한 영역이다. ‘속된 것’이란 우리 인간이 그 일상생활에서 수시로 접촉하고 있는 사물, 인간, 사건들이다. 이들은 그 모두가 ‘속된 것’의 영역에 속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인간이 태고적부터 그 이상(理想)으로 삼고 있는 ‘참된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 역시 ‘속된 것’의 영역에 속하며, ‘거룩한 것’의 영역에 속해 있지 않다. 종교에 고유한 영역인 ‘거룩한 것’은 거룩한 것이 아닌 그 어떤 것과도 다른 그리고 서로 엄격히 구별되는 하나의 독특한 영역이다. 따라서 ‘거룩한 것’은 그 어떤 것에도, 비록 그것이 ‘참된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에로 환원되어 버리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종교는 종교가 아닌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되어 버릴 수 없는 ‘거룩한 것’이라고 하는 그 고유의 영억을 갖는다.

   2. ‘거룩한 것’이란 독일종교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 1869~1937)에 의하면, ‘두렵고 떨리는 신비 그리고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신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osum)이다. ‘거룩한 것’은 우선 ‘두럽고 떨리는’ 신비이다. 두려움은 단순한 무서움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두려움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그 밑바닥까지 뒤흔들어 놓고 떨리게 하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신비 앞에서 전적으로 압도되어 버리고 만다. 인간은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이 점점 더 작아지는 것을 느끼며, 마침내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무(憮)처럼 느끼게 된다. 반면에 ‘거룩한 것 ’ 그것은 모두이며 일체의 것으로 부각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것을 감당해 낼 수 없게 되며 그로부터 도망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룩한 것’은 동시에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신비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경험하는 인간을 열광케 하는 그러한 신비이다. 인간은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이 남김없이 채워지고, 한없이 행복감에 젖어 들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그에 완전히 사로잡혀 거기서 결코 떠날 수 없게 되고 만다.

   ‘거룩한 것’은 이와 같이, 한편으로 인간이 그 앞에서 견디어 낼 수 없기 때문에 도망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신비인 동시에, 다른 한편 인간은 그에 전적으로 사로잡혀 결코 그 앞에서 떠날 수 없는 그러한 신비이다. ‘거룩한 것’은 그 자체로 결국 하나의 ‘신비’(Mysterium)이다. ‘거룩한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감추어 두고 있다. ‘어둠’이라는 장막(帳幕)속에 숨어 있다. 우리 인간에게는 스스로 그에게로 접근해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3. 그러나 이 ‘거룩한 것’은 때때로 그리고 예외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어움의 장막을 헤치고 마치 한가닥의 ‘빛’처럼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다만 간접적으로 다른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열어 밝혀 줄 뿐이다. ‘거룩한 것’이 자기가 자기 자신을 드러낼 때에는 언제나 일정한 사물(事物), 인간 그리고 사건을 그 매개체로 삼는다. 그리하여 ‘거룩한 것’은 언제나 ‘속된 것’을 통해서 그리고 ‘속된 것’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열어 밝힌다[聖顯, Hierophania]. ‘거룩한 것’은 ‘속된 것’을 떠나서 따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거룩한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속된 것’의 영역에서이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은 언제나 구체적인 ‘바위’, ‘나무’, ‘태양’, ‘하늘’ 등과 같은 사물을 ‘거룩한 것’을 경험하고, 또한 구체적인 위대한 예언자 또는 성자(聖者)를 통해서만이 ‘거룩한 것’과 대면하고 그것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이 ‘거룩한 것’을 경험하고 체험할 때, 이러한 경험 또는 체험은 하나의 종교를 형성하게 만든다. 그런데 ‘거룩한 것’에 대한 경험 내지 체험은 다만 하나의 형태로만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가능하다. 그리고 ‘거룩한 것’에 대한 경험의 다양한 형태는, 바로 다양한 형태에 있어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종교들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결과로 세상에는 하나의 유일한 종교만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태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하고 있다. (鄭達龍)

   [참고문헌] M. Eliade, The Sacred and the Profane, New York 1961 / F. Heiler, Erscheinungsformen und Wesen der Religion, Stuttgart 1961 / G. Otto, Das Heilige Munchen 1963 / M. Scheler, Vom Ewigen in Menschen, Bern-Munchen 1968 / G. Wiedengren, Religionsphanomenologie, Berlin 1969 / W. Windelband, Praludien, 2 Bde., Tubingen 1924.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