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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활,사순 시기, liturgy, Missa, 천사와 악마, 종부성사, 그리스도의 탄생,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 등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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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Jesus Christus
영어
Jesus Christ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누가 말하고 있는가 :
그리스도교
의 창립자로 통하는 나자렛 출신
예수
란 분이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린다.
예수
란 단어는 "하느님이 살리신다"는 뜻인데,
유태교
문화권에서 흔히 쓰이던 사람의 본명(本名)이며, 그리스도란 그리스말은 히브리어 ‘마샤’(메시아)를 번역한 것인데 기름 부음을 받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인물을 가리킨다.
구약성서
의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탓으로
예수
를 그리스도로
고백
하기 어렵게 된 까닭에 한국에서는
예수
를 단순히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관례가 되었지만,
예수
의 정체와 역할을 드러내는 호칭(하느님의 아들,
주님
,
구세주
등)을 사용하는
교회
의 전통은
예수
가 단지
예수
님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주장해 왔다. 다른
종교
의 창설자(모세, 마호멧, 석가모니 등)와 달리,
그리스도교
에 있어서
예수
는 그분이
계시
해 주신
하느님 아버지
못지않게
신앙
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
냐
예수
그리스도냐 하는 문제는,
예수
란 인물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인간
의
신앙
적 결단과 증언을 요구한다고 하는 사실을 처음부터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누구나 이 문제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을 밝히지 않는 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한다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환기시켜 둘 필요를 느낀다.
신앙인으로서의 입장을 떳떳하게 밝혀 놓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인데 그들은
예수
를 인류의
구세주
이며 하느님의 참된 아들로
고백
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
께서 하느님의
생명
으로
죽음
을 이기고
인간
으로서도 살아
계시
다는
부활
신비
를 통해서, 그분의 지상생활을 이해하고 소개하는 복음서와
신약성서
의 다른 저서를 바탕으로 해서, 그들의 각 문화권의 요구에 따라, 인류의
구세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세상
에 계실 때 아버지라고 부르시던 하느님과의 관계를 명시해야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려면 그들이 지상
예수
께로 돌아가는 독특한 방법을 고려해야 하고,
삼위일체
교리
로 정리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기본 부자(父子)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가 동양문화권에 진출하자, 그리스도 교인들은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명명(命名)해야 하였다. 그들은 전통사상[天사상]을 무시하지 않고 잡신[천지신명]들과 혼동하는 일도 없이 하느님의
초월
성을 살리기 위하여,
예수
께서 아버지로 모시던 하느님을 천주(天主)라고 불렀다. 천주님이라고 불린 하느님은
철학
가들의 신과 민간
종교
인들의 이신(理神)과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명시했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상하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가 희미해졌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 역할을 맡은 뛰어난 현인 내지, 불쌍한 중생을 위하여 고생하는 선각자 정도로 생각될 위험이 있다. 오늘날
한국
천주교
회는 선배교회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예수
와의 관계를 밝힐 과제를 안고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말하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예수
의 주장과 정체가 신인(神人)관계를 기본적으로 새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이외에도 수많은 현대인들이
예수
에 대해서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순수한
종교
의 범위를 떠나서도 나자렛
예수
처럼 인류사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 드물 것 같은데,
예수
를 그리스도로
고백
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를 부당하게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의 소리가 들린다. 사실상 오래 전부터
예수
란 인물이 많은 사색가나
철학
가들을 매료시켜 왔고, 하느님과
교회
를 거부하면서도
예수
에 대한 존경과
공경
을 표한
사회
개혁가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막다른 길에 빠진
공산주의
철학
가들도
예수
께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예수
의 진면목을 흐리게 하고 자기네들의
세속
적인 싸움터에
예수
그리스도를 끌어들이려는 속셈은 고발해야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주장대로
예수
께서 참으로
인간
이시고 우리
역사
속에 인류의 구원을 마련하시고 온갖 악에서 인류를 해방시켜 주시는 인물이라면
신앙
말고도
예수
께 접근하는 다른 길, 즉
역사
적인 방법이 당연히 트여야 한다는 견해도 검토해 볼만하다. 오랫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에 관한
역사
학적인 연구방법에 대하여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유인즉,
성서
의 독특한 성격을 배려하지 않고
부활
교리를 제외하고 즉음으로 끝나는 지상생활만 연구한다면,
예수
의
신비
를 제거하고
예수
의 주장과 활동을 변질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세기에
역사
의
예수
와
신앙
의 그리스도를 대립시켜 놓고,
신자
들이 모시는 그리스도가 초대
교회
의 조작품이라느니
바울로
사도
가 그리스
신화
를 본떠서
예수
를 신격화했다느니 하는 터무니없는 비방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헌 분석 방법을 정리한
역사
학자들의 요구를 거절할 이유는 없다. 그리스도인들 이
예수
에 관한 자료[복음서]를 거의 다
신앙
인으로서 전수했다 하더라도
예수
는 분명히 가상인물이 아니고
역사
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성실한
사학
가들은 19세기에 나돌던 허황한 가설들은 일축하고
예수
시대의
환경
을 재발견하면서
예수
의
설교
, 주장, 활동의 독특함을 잘 드러냈다는
공로
를 인정해야 한다.
19세기 작가들의 기분에 따라 무기력한 몽상가로, 혹은 예리한
사회
개혁자로 통하던
예수
는
하느님 나라
에 전념하고
죽음
을 각오하는 자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종교
사회학적으로 간단하게 풀이해 낼 수 없는
신비
로운 그 인물의 언행을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전세기의 작가들이 남긴 문제를 떠나서
예수
의
역사
성을 중요시하는 이유도 있다.
예수
의
인간
성을 규명하던 전통적인
인간
학이 무너지자 우리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으로 전제되는
인간
성을 되찾는 길은
역사
뿐이다.
예수
가 정말
역사
적인 인물이라면, 즉 우리
인간
사회 속에서 부대끼고
죽음
까지 당한 인물이라면 그분일 참된
인간
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역사
와
신앙
이 서로 상반되기는커녕
역사
의 한계성과
신앙
의 특징, 즉
역사
와
신앙
의 차이점과 연관성을
제대
로 직시하면
예수
에 대한 적절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은 추상적인
진리
의 체계가 아니라 독특한 의미를 띠는
역사
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2.
역사
가
예수
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
자유주의
선입관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초보적인
단계
에 머물렀던
성서
의 문학비판을 통해서
예수
의
역사
성을 뒤흔들었던 19세기의
역사
주의를 벗어나서 현대의
성서
해석학자들은
사학
적인 방법으로
예수
의 진면목을 재발견하였다.
역사
가
예수
의 궁극적 비밀을 드러내보여 주지는 못하고, 모든 삶을
예수
께 내거는
신앙
생활의 동기를 제공하지도 못하며, 하물며
예수
를 믿어야 한다는 쪽으로 이끄는 확증을 제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예수
를 이해하게 하는 데 크게 공헌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역사
의 한계성과
신앙
의 특징을
제대
로 파악하고
신앙
의 불가피성을 증명하려는 호교론을 피하며 전근대적 방어태세를 버리면
역사
는 그 나름대로 대단히 귀중한 도움을 준다.
예수에 관한 문헌을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하나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들이 남긴 기록들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
밖에서 당대 일반
사학
가들이 남긴 글들이다. 후자부터 살펴보면, 유태인
사학
가
요셉
플라비우스는
로마제국
의 ‘판무관’
본시오 빌라도
시대에 낳은 제자를 가진 현인으로 보이는
예수
가
십자가
에 못박혔다는 증언[유태교 고대사기 18, 63-64]을 남겼고,
로마제국
의
사학
가들은 그리스도란 이름으로 알려진 인물이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에
본시오 빌라도
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기록을 남겼다[타치투스, 연력 15.77.3, 수에도니우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생애 25, 4]. 소(小)프리니우스가 110년쯤 비티니아 총독으로 지낼 때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 처형된 그리스도를 하느님처럼 신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들이 남긴 저서들은 복음서들(마르코 : 70년,
마태오
와
루가
: 80년, 요한 : 90년 이후)과
바울로
의
서간
(50∼60년)과 다른 작가의
서간
으로 형성된 우리의
신약성서
를 말한다.
부활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
하면서 초기
공동체
들은 지상에
계시
던
인간
이신
예수
에 대한 정보를 전하는 복음서를 작성하였다. 복음서를 구성하는 여러 전승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전승이 사실과 가장 가까운 전승이라는 문학비판의 단순한 주장을 떠나서 보다 확실한
사학
적인 원칙에 따라 현대
사학
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예수
의 모습을 추궁할 수 있다.
예수
에 관한
사학
적인 연구방법의 원칙이 이른바 ‘차이의 원칙’이다. 초대
공동체
가 자기 관심사에 따라
예수
에 대한 이야기를 조작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으나 초기
공동체
가 도저히 조작할 수 없는
장면
과 발언들은 이를
예수
의 지상시대에까지 소급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당시
유태교
의 배경으로 보아서, 당대 사상과 맞지 않는 부분도 역시 배척할 수 없는 증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신약성서가
예수
의 일생에 일어난 사건들에 관해서 제공하는 자료들을 분석해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뜻 깊은 사실을 발견한다. 즉 그분의
죽음
을 기점(基點)으로 하여,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의 만찬
,
공생활
을 거쳐 그분의 탄생에로 소급해 올라갈수록,
역사
적 확실성의 정도가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
께서 돌아가신 날짜에 관해서는 우리가 거의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요한 복음서
를 바탕으로 하여 연대기적 계산에 따르면,
예수
께서는 서기 30년 4월 7일 금요일에 돌아가셨다고 할 수 있다.
죽음
과 관련하여 최후만찬의 날짜에 있어서는
공관복음서
와 요한복음서 사이에 차이가 있는데, 전자에 따르면
예수
의 최후만찬이
유태교
과월제
때에 주행사로 여겼던 식사 도중에 이루어졌던 것 같고, 반면에 요한에 따르면
예수
께서 과월절 전날에 돌아가신 것으로 되어 있어서(요한 19:17-36) 최후만찬은 물론 그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공생활
에 대하여는 4개 복음서의 증언으로 보아서 서기 27∼28년에
예수
께서 활동을 시작하셨다는 결론이 타당하다. 그러나 활동경위에 있어서는 복음서의 기록들을 조화시킬 수 없다.
공관복음서
에 따라
예수
께서 갈릴레아에서 대중을 상대로 활동하시다가
예루살렘
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제자들의 양성에 전념하시고 마지막으로 겨우 일주일 사이에
성도
에 입성하시기도 하고
성전
을
정화
하시기도 하며
유태교
의
장상
과 잦은 충돌 끝에 잡히시어 처형되셨다는 복음서의 순서가 문학적 기법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예수
께서 여러
차례
에 걸쳐
예루살렘
에 올라가셨고
마르코 복음서
에 기록된 것과는 달리
예수
의 여정이 무척이나 복잡하였다.
예수
의 탄생
연도
에 대하여는 복음서의 기록과 일반
역사
가 전해주는 자료들을 맞출 수가 없다. 헤로데 대왕이
기원
전 4년에 사망했다는 사실과
마태오
2:19과
루가
3:1에 언급된 퀴리니우스
시리아
총독이 실시한 인구조사(기원전 7년)로 미루어 보아 서른 살 가량 되어(루가 3:23)
공생활
을 시작하신
예수
의 탄생
연도
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복음에서 장소와
시기
에 관한 언급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예수
의 전기를 일일이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
복음사가
들은
예수
의 일생이 특정한 장소와 일정한
사회
속에서 이루어졌음이 틀림없으나 평범한 공간과
시간
을 능가하는 차원에서
예수
의 비밀을 암시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 듯하다.
예수의
죽음
이후부터
예수
를
주님
으로 모시는
공동체
들은 지상에
계시
던
예수
에 대한 자료를 전하려고 애썼던 것이 사실인데, 그 자료를
사학
적인 방법으로 분석해 보면
예수
의 인물 윤곽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문헌에 의하면
공생활
을 시작하신 무렵에
예수
께서
세례자 요한
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 당시에 퍼져 있던
종교
단체(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 엣세파) 중 특정한 사조인 세례운동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은
예수
께서 당연히
예언자
의 모습을 취하시고
종말론
적 사상에 역점을 두셨다는 의미이다. 세례운동자들은,
하느님 나라
의 도래, 즉
심판
과 구원의
시기
를 선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례운동의 배경으로 미루어 보아 이런 상황 속에 나서신
예수
께서는 구원을 얻기 위해 필수적인 방법으로 여겨졌던
유태교
제도의 주축을 이루는
성전
예식과
율법
의 엄수문제와 부딪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예수
께서는
이스라엘
의 기본제도에 대하여 융통성 있는 태도를 취하셨다.
예수
께서는 하느님에 관한 기본사상을 받아들이고
회당
에 다니시면서도 전통적인 규칙과 거리를 두고
유태교
에 대하여 굽힐 줄 모르는 자유를 보이셨다.
유혈제
사를 올리던 장소의 의미를 새롭게 하시고(마르 11:15-19)
성전
의 파괴를 예고함으로써 하느님을
만나
는 새 장소를 마련할 의사를 표시하셨다.
안식일
에 관한 규칙을 상대화시켰고(마르 2:23)
율법
을 재해석 하면서도 새 가르침을 선포하셨다(마르 1:27). 구원의 유일한 방법으로 통하던 예식과
율법
에 도전함으로써
예수
께서 새로운 구원제도의 선포자와 창설자로 나타나셨다.
예언자
라고 자처하지 않으면서도 실제로는
예언자
로서 행동하시던
예수
께서는
하느님 나라
가 임하는 과정에서
정치
적
폭력
을 배제하였는데, 이는 권세를 떨치며
하느님 나라
와 부합하는
이스라엘
의 왕국을 수립하리라는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
사상에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당시 대중들의 기대와
종교
계의 지배적인 사상에 비해
예수
께서는 이색적인 인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새 시대의
예언자
로 나서신
예수
께서는 자기 삶속에서
하느님 나라
에 해당하는 표징을 보이려고 계획적으로 행동하셨다. 악령을 쫓아내는
구마
행위와 치유활동을 통해서
예수
께서는
하느님 나라
의 선포자 뿐 아니라 그 나라를 이룩해 주시고 실현시켜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려고 하셨다.
역사학적인 입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여러 자료를 분석하고 정리해 보면 첫째로 구원문제와 관련하여
예수
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이스라엘
의 예식제도와
율법
에 도전함으로써
예수
께서는 이미 지나간 옛 제도를 거부하였고 죄의
용서
를 베풀고
하느님 나라
의 도래를 선포함으로써 다가오는 구원, 즉 완성에로 발전하는 구원을 향하게 하셨다. 그러나 현재에 있어서 구원이란 새
인간
관계는 지금 당장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활동하는
예수
께서 당신 가르침과 행동, 제자들에게 즉각적이고 전폭적인 추종을 요구하시는 태도를 통해서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구원을 실현한다는 인상을 주셨다. 둘째로
예수
의 언행을 보면
예수
의 정체문제가 제기되게 마련이다.
예수
는 누구이길래 이런
권위
를 발휘할 수 있었을까? 당대인들이
예수
를
세말
의
예언자
로 보고 있었지만 이미 본 바와 같이 너무 막연한 견해였다.
구약성서
에 나오는 여러 호칭(메시아, 다윗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들을 거부하거나 소극적으로 묵인하는
예수
께서는 당대인들이 전통적인 사상과 통념을 버리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려는 듯한 인상을 주셨다. 사람의 아들이란
신비
로운 명칭을 이용함으로써
예수
께서는 자기 자신을
하느님 나라
의 절대적인
봉사자
와 담당자로 암시하려 하셨다. 셋째로
예수
께서는 세월이 갈수록
유태교
의
장상
과 빈번한 충돌로 인하여
죽음
을 의식하고 각오하셨다는 사실을 빠뜨릴 수 없다.
권위
를 발휘하고 신인관계를 새롭게 한다는 주장 때문에
예수
께서는 그 활동의 초기부터
죽음
의 위협을 받다가 마침내는
순교
하던
예언자
들의 운명을 당하리라고 의식하고 계셨다. 마지막으로
예수
께서는 당신
권위
를 절대화한 일이 없었고 오히려 스스로 아버지라고 부르던 하느님께 얼마나 철저히 의존해 있는지를 보여 주셨다.
요약해서 말하면 구원에 있어서 엄청난
권위
를 주장하면서
죽음
을 각오하고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주장하신
예수
의 모습은 아직도 많은 질문을 야기시킨다.
3. 믿는 이들이
예수
를 그리스도로
고백
한다 : 굳어진
사회
에 도전하는
용기
를 칭찬하거나 신인관계를 배경으로 하여 인생문제를 직시하는 사색에 공감하는 태도는 그리 어렵지 않으나, 문헌들이 ‘단순한
예수
’를 능가하는
예수
를 소개한다 해도
예수
를 인류의
구세주
이며 하느님의 참된 아들로
고백
하는 차원은 다르다.
예수
를 그리스도로
고백
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
역사
속에 온 인류를 위하여
인간
으로서 살았던 그
예수
를 통해서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
의 주장은
유태교
를 위협하는 공격으로 이해될 수 있고,
신자
들의
고백
은 신인관계에 입각하는 대인 관계를 요구함으로써
정치
를 상대화시키는 도전으로, 전통이나 어떤
철학
에 따르는
인간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모험으로 보인다. 하느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시
는 신이 아니고
인간
의 존엄성을 상상 외로 들어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의 주장과
신자
들의
고백
이 위험하고도 매력 있는 공상으로 타락되지 않기 위하여서는 끔찍한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 이는 곧
예수
죽음
의 장벽이다. 다시 말해서 사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앞지르고 있다면,
예수
란 인물이 모든 이념의 기수가 된다면 그분의 신분과 역할이 무의미하게 되고 만다. 그렇다면 지상의
예수
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넘어가는 과정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는가? 과거의
예수
와 현재의 그리스도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은
부활
하신
예수
를
고백
하는
신앙
이다. 제자들은 지상에서 활동하시는
예수
에 대하여
신뢰
심을 가졌고, 그분을 따르기로 결정했으며, 그분을 위하여 투신(投身)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승의 수치스런
죽음
과 함께, 그들이 삶을 내걸고
생명
을 바칠 만한 근거도 같이 사라졌다.
유태교
사회
에서 하느님의 모독자로 처형된 자가 구원의 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리운 인물에 집착한 나머지
예수
의 사상을 퍼뜨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왜 사상보다 그분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유일한
구세주
로 받들었을까? 선의와
신뢰
로 시작된 애착이 순수한
신앙
으로, 즉 그분의
신비
를 알아 모시는 유일한 접근
수단
으로 변했던 것일까? 그것은
예수
께서
죽음
을 당하신 뒤에 그들이
예수
를 살아 계신 분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예수
부활
의 표징 정도밖에 못 되는 발현에서 뿐만 아니라, 온 생활 속에서
예수
의 현존을 느꼈다. 자기들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
예수
를 살아 계신 인격체로 체험했는데, 이는 그들의 새 생활이 지상
예수
곁에서 느끼고 체험했던 것과 부합했다는 뜻이다. 그들은 생활 속에 바로 그
예수
를 체험했기 때문에
예수
께서
죽음
의 포로가 아니라
부활
하신 몸으로 계신다고 믿었다. 현존하시는
예수
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그 전에 쌓아두었던 경험에로 되돌아가게 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예수
께 대한 기억을 악몽처럼 깨끗이 잊어 버렸을 것이다.
예수
의 주장과 지상생활을 무효화시키는
죽음
을 극복하는 이변이 없는 한, 그들은 단순한 추억 속에
예수
께로 돌아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부활
하시어 새 형태로라도
인간
으로서 살아 계신다고
고백
하는 제자들은
예수
의 정체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하느님이 이
세상
에 임하시어
인간
들에게 죄의
용서
와 새
생명
을 베푸신다는 복음을 골자로 하는
하느님 나라
를 선포하시고 하느님의 현존에 해당하는 표징(치유 ·
구마
· 죄의
용서
)을 보여 주신
예수
께서, 옛
예언자
와 달리 선포가 뿐만 아니라 구원의 첫 수혜자(受惠者)로 나타나셨다. 죄의 결과인
죽음
에서 구제를 받으신
예수
께서는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3:16에 따라 ‘의화’되셨다. 죄 있는 자가 죄에서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이
예수
의 의로움을 드러내 보이셨고 죄의 결과를 취소하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인간
인
예수
를 위하여 구원의 능력을 결정적으로 행사하셨다. 그리고 끝나기도 전에, 즉 최후
심판
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런 혜택을 받으신
예수
께서는 인류의
구세주
로 드러나셨다.
시간
속에, 바로 이
세상
에 살아야 할 우리들에게 하느님이 찾아 주시는 길을 터 주신
예수
께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시는 유일한
중개자
(仲介者)로 나타나셨다. 지상에
계시
던
예수
의 언행에 입각하여 다른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한층 더 나아가서 구원이 있다면 오직 하느님이 마련하신 구원밖에 없다. 그렇다면
예수
를 위하여,
예수
를 통하여 이루어진 이
구원사
건을 보고
예수
와 하느님의 관계를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상에서 하느님을 ‘아빠’로 부르시던 그
예수
를 당연히 하느님의 친아들이라고
고백
해야 했다.
영원
토록 하느님으로
계시
고
시간
속에
인간
으로
계시
는 변함없는 그 아들이 우리
구세주
이며 하느님의
계시
자이시다. 아드님은
인간
이 되신 과정과
죽음
에서
부활
하신 몸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도 성신의 역할을 드러내 보이셨다(로마 8:9-11). 하느님과 아들 사이에 맺어진 부자관계, 그리고 아들과 그
인간
예수
의 동일성을 보장하시는 성신께서
계시
됨으로써 하나이신 하느님이
삼위일체
로
계시
다는
신앙
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한 하느님, 우리 가운데
계시
는 하느님으로
고백
되면서
인간
의 구원이 이루어졌다.
신앙
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인간
예수
를
부활
시키신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
가 제자들의 깨달음을 정리하고
예수
의 정체와 역할, 즉 구원자이신
예수
와 하느님의 관계를 명시하는 과제를 맡았다.
메시아
와 의인들에게 적용되었던
구약성서
의 전통적인 호칭을 재개발하여
예수
의 정체와 역할을 규명하는 초대
교회
가
예수
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이 복합호칭을 분석해 보면, 원래 하느님께만 적용되었던
주님
이란 호칭은
인간
을 위하여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활동방식을 잘 드러내는데 원래
이스라엘
을 구해 주는 자를 뜻하던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이제 온 인류의
구세주
라는 의미로 통한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호칭은
본성
문제에 앞서 하느님이신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친밀한 관계를 말해 주고 있는데, 히브리 사고방식대로 부자관계는 종적 관계보다 횡적 관계, 즉 동등한 입장을 뜻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호칭은
신성
에 있어서
예수
의 위치를 알맞게 말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이란 단어는
예수
의 아버지이신 천주 성삼 제1위를 가리키는 것이
신약성서
와 특히
바울로
서간
의 통례이다. 호칭에 못지않게 초대
교회
는
예수
의
인간
성과
신성
을 표현하는 도식(靈-肉, 前-後, 上-下 등)을 개발했다(로마 1:3-4). 변함이 없는 아들이 하느님으로서 그리고
인간
으로서
계시
다는 사실을 표명하는 이 도식들은 나중에 발전하는
그리스도론
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신약성서에 담긴 내용을 보존하며 설명하는
교회
는 희랍문화권에 접근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과
인간
성을 재확인하고
신성
과
인간
성의 상호관계와 이 두
본성
의 주체이신 아들의 위치를 밝히는 업무를 수행해 왔다.
인간
이고 하느님이신 아들이 마련하신 구원의 조건을 거울로 삼아
교회
가 소위 ‘구원론적 원칙’에 따라 우리
구세주
의 정체를 명시하였다. 구원을 물질세계에서의 해방으로 잘못 이해하는
이단
을 공박하는
교부
들이
예수
의 참된
인간
성을 재확인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아들과 동일시해야 하는 말씀이란 호칭을 우주의 이치란 의미로 이해하고
예수
를 뛰어난 피조물로 보는 아리우스 같은 자가 있었는가 하면
예수
를 말씀과 육체의 결합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고
인간
인
예수
의
영혼
을 부정하는 아폴리나리스 같은 자도 있었다. 현대
인간
학의 개념과 맞지 않다고 해서 문제의 심각성을 잘못 파악할 수도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죄 외에 우리와 같은
인간
이 아니시면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원칙을 상기시켜 주었던 점이
교부
들의
공로
이다.
예수
의
신성
을 중심으로
삼위일체
교리
를 재표현하는 작업이 필요하였다.
본성
보다 관계와 역할을 따지는 히브리문화권과는 달리 희랍문화권에서
성부
,
성자
, 성신이 유일한
신성
을 공유한다는 니체아
공의회
(325년)의 결의문을 통해서
교회
는
예수
의
신성
을 재확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신성
과
인간
성의 단순한 결합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이런 경우에는 두 주체, 즉 하느님의 아들과
인간
인
예수
를 대립시킬 위험이 있는가 하면(네스토리우스의
이단
)
인간
이
신성
안에 흡수되다시피 하여
예수
의
신성
에만 기울어지는
에우티케스
의
이단
이 생길 우려도 있다.
에페소
공의회
(431년)는
마리아
를 하느님의 모친이라고 선포함으로써 하느님이신 아들이 유일한 주체이며
영원
한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
이 되셨고 그 하느님의 아들은
신성
과
인간
성의 결합의 원인이지 결과가 아니라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칼체돈
공의회
(451년)는
신성
과
인간
성이 혼동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아 하느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주이신
예수
께서 두
본성
의 유일하고 동일한 주인이시라고 선포하였다. 나중에
이단
이 생기는 대로 제2차(455년)와 제3차(680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들이 이 주요 결의문의 결론을 내렸다. 우리
구세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이시고
인간
이신
성자
라고 함으로써
교회
가
계시
에 또 다른
교리
를 첨가시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성서
내용에 대하여 유권해석을 내렸을 뿐이다.
성서
적 용어가 아닌 단어나 개념을 이용했다 해도
계시
를 변질시켰다기보다
계시
의 내용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을 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4.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는 장소 :
예수
께서는
부활
하신 몸으로 이제 끝없이
인간
으로
계시
고 우리
세상
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얼굴이라서 바로 이
세상
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장소를 마련해 주셨다.
예수
께서는
죽음
으로 인하여 부재상태에
계시
니 이제 더 이상 육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부활
로 인하여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니 이제 인격적인 차원에서 우리를 찾아 주신다. 당신 몸인
교회
를 통해서
예수
께서는 세례자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이
교회
를 통해서
성서
를 당신의 말씀으로 활성화하신다.
교회
를 통해서 당신 몸과 피를 나누어 먹이심으로써 우리를 찾아 주신다.
교회
를 통해서 당신 몸과 피를 나누어 먹이심으로써 우리를 당신
생명
에 참여케 하신다. 빵과
포도주
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
과 피를 나누어 먹이심으로써 우리를 당신
생명
에 참여케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아들을 통해서 성신에 의하여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
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은 물질세계를 돋보이게 하고 물질에
상징
적 가치를 부여 하시어 우리 구원의 실제성을 암시해 주신다.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
이 되심으로써 만민 가운데 한 민족에 속해 있는 몸으로
시간
속에 짧은 기간 동안 이
세상
에 살다가
죽음
을 당하셨으니
인간
성의 제한성을 취하셨고,
죽음
을 넘어서 살아
계시
는
부활
한 몸으로 각
인간
의 침해할 수 없는 자유와 유린할 수 없는 존엄성을 보장해 주신다. 태어나고 죽고
부활
한 그 몸이 하느님의
계시
이며 인류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인간
으로서 살아
계시
는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 관계를 완성시킴으로써
인간
의 최후 목적과 동시에
인간
성의 절정에 달하는 길을 밝히셨다. 사람과 함께 살아
계시
는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의
인간
사회
를 새롭게 하는 유일한
구세주
이시다. 따라서
신자
들은 과거의
예수
를
모방
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
함으로써 현재의
예수
를 추종하고 있다.
신자
들이 과거의
예수
를
모방
하는 것은
부활
을 부정하는 것임과 동시에
예수
를 이용하는 것이 되는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
하는 것은 물질세계와
인간
사회와 각 개인이 하느님과 의존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하느님과의 의존관계가 피조물의 상대적인 자율성을 보증하면서 각 인격자의 자유를 살린다. “이
세상
도
생명
도
죽음
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1고린 3:22-23)이기 때문이다. (文世華)
[참고문헌] Ch. Duquoc, Jesus Homme Libre, Cerf, 1974 / W. Kasper, Jesus der Christus, Matthas-Grunewald-Verlag, 1974 / Ch. Duquoc, Christologie I(1968), II(1974), Cerf / Ch. Perrot, Jesus et l'Histoire, Desclee, 1976 / B. Sesboue, Jesus Christ dans la Tradition de l'Eglise, Desclee, 1982 / J. Moltmann 著, 김균진 譯,
십자가
에 달리신 하나님, 한국신학연구소 출판부, 1978.
출처 : [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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