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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인쇄

한자 宗敎改革
라틴어 Reformatio
영어 Reformation
독일어 Reformation

   1. 어원적 의미 :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교회가 속화되었을 때에는 개혁의 외침과 쇄신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교회혁신 운동은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이다. 이 사건 자체는 교회 쇄신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1,500여년 동안 전승, 보존된 그리스도교 신앙을 근본적으로 파괴하였고 하나의 그리스도교 세계를 여러 갈래의 분파로 분열시켰다. 그런데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교회 안에서의 개혁(Reform)과 교회 밖에서의 개혁(Reformation)으로 구분된다. 교회 안에서의 개혁은 가톨릭 종교개혁으로서 가톨릭 교회 쇄신(Catholic Reform) 또는 반동 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라고 일컬어지고 있고, 교회 밖에서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서 단순히 종교개혁(Reformation)이라고 불리고 있다. 따라서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는 개신교의 탄생을 초래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지칭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개혁에는 루터종교개혁과 이에 따른 유럽 대륙에서의 종교개혁, 즉 츠빈글리종교개혁, 재세례파의 급진적 종교개혁, 칼빈의 종교개혁, 그리고 영국종교개혁 등이 있다.

   2. 역사적 원인 : 정치적으로 볼 때에 중세 말기에 이르러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 서부 유럽 국가들은 중앙집권 체제의 군주제로 발전하여 각 국가는 그리스도교 제국의 전체 이익보다는 자국(自國)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었다. 반대로 독일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지방 분권화의 정치상황에 놓여 있어 황제는 자신의 직책을 수행하는 데에 지방 제후들에 의해 제한을 받았다. 여기서 중앙집권 체제는 교회를 국가에 예속시키고자 하는 국교회 사상을 초래하여 교권이 약화되는 원인이 되었고 지방분권은 그리스도교의 단일성을 유지하는 데에 장애가 되었다.

   경제 및 사회적으로 볼 때에 도시와 지방의 빈부 차이가 심하였다. 도시인의 배금사상은 인간 구원도 돈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여 이는 대사부(大赦符) 판매의 길을 쉽게 열어 주었다. 한편 지방에서는 일부의 귀족과 몰락한 기사, 농민들이 가난과 불만 속에서 어떠한 혁명을 기대하고 있었다. 지성적 배경에서는 14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5∼16세기에 영국, 스페인, 프랑스에 번진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북부 유럽에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 또는 성서적 인문주의로 발전하면서 교회개혁을 촉구하였다.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생활에 있어서 초대 교회의 제도와 규율을 다시 일으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루터종교개혁을 사도시대의 교회로의 복귀를 확신하는 데에 길을 마련하였다.

   신학적인 면에서 볼 때에 대사, 구원, 미사성제, 성사, 교회, 교황의 수위권 등 핵심적 신학문제들이 교회 당국에 의해서 확실하게 정의되지 못하여 신학의 불확실성 시대를 초래하였고, 이는 루터신학적 공격과 논쟁을 일으키게 하였다. 또한 14세기의 유럽정치적 동요, 전염병, 농민 반란 등의 사회적 불안 속에 있었다. 이는 불행에 허덕이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세속적 관심을 제거하고 영혼이 신과 직접 대면하고자 하는 열망을 일으켰다. 개인의 종교적 체험과 신심을 강조하는 신비주의는 교회의 성사 신학을 비판하므로 반(反)성직자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실천적 신비주의는 ‘새로운 신심’(Devotio Moderna)이란 운동을 일으켰고, ‘공동생활의 형제회’라는 신심단체를 탄생케 하였다. 이 단체의 회원들은 당시의 속화된 교회를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그 개선을 추구하려고 노력하였고 이를 위해 교육에 전념하였다. 뒤에 ‘공동생활의 형제회’에서 운영한 학교에서 교육받고 배출된 이들 중에 루터, 칼빈, 츠빈글리 등의 종교개혁가들이 들어 있었다.

   교회 상황은 14∼15세기에 일어난 일련의 불행한 대사건, 즉 ‘교황청의 아비뇽 천도’와 ‘서구의 대이교’는 교회의 영향력을 상실케 하였고 교황권을 약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이러한 교황청의 분규는 ‘공의회 지상주의’의 운동과 위클리프 및 후스의 이단 운동을 일으켜 교황의 권위는 더욱 떨어졌다. 그리고 르네상스의 교황들은 그들의 시대적 사명인 교회 쇄신이슬람교도에 대적하는 서구의 단합을 완수하지 못하고 오히려 일부 교황은 족벌주의 정책을 감행하였고 자기 중심의 배타심에 물들어 있었다. 특히 개인주의는 교황 취미의 소산인 문화적 업적에 공헌하였지만 베드로 대성전의 재건을 위한 대사부 판매는 종교개혁의 직접 동기가 되었다. 아울러 주교직은 귀족의 독점물이 되었고 이는 정신적 직책보다는 세속직업의 인상을 주었다. 따라서 일부 고위 성직자들은 그들의 영신적 사명감을 망각하고 물질적으로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반면에 하급 성직자들은 제대신학 교육과 영신도자를 받지 못하였다. 참다운 수도 성소를 갖고 입회한 수도자가 적었고, 수도회 사이에 분열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평신도들의 신심은 너무 외적인 면에 치중하였고 자주 미신과 결부되었으며 이기적이며 물질적 효과에 밀착되어 있었다. 이는 대사부의 판매를 가능케 하였다.

   3. 루터종교개혁 : 교황 레오 10세는 선임 교황 율리오 2세가 베드로 대성전의 재건을 위해 1507년에 반포한 전대사를 다시 선포하였다. 그리고 모금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대사 설교가 필요하였다. 독일신성 로마 제국에서도 대사위원회가 설립되어 설교 지침서가 발간되었고 설교가들이 임명되었다. 이 지침서는 대사에 대한 교리를 약술하였고 반면에 모금 목적을 위해 대사를 과찬하여 상품화함으로써 일반 대중이 그 본래의 의미를 망각하고 남용하도록 오도하였다. 루터가 거주하는 비텐베르크에서는 대사 설교가 허용되지 않았으나 그의 교우들이 이웃 지방에서 활동하던 요한 테첼의 설교를 듣고 대사부를 사오는 광적인 소란에 충격을 받고 대사 남용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일련의 신학명제(95개 조목의 명제)를 작성하여 1517년 10월 31일에 그의 주교와 동료 교수들에게 발송하였다. 이는 후에 출판업자들에 의해 간행되어 세상에 나옴으로써 문제화되었다.

   1518년에 이르러 루터의 명제는 신학자들의 반박을 받았고 그는 수도원 참사회에 소환되었으며 로마에서 파견된 카예타노 추기경의 심문을 받았지만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루터는 1518년 11월 9일에 반포된 대사에 대한 교회 입장과 1520년 6월 15일에 공포된 <교회 교서>에 불복하여 1521년 1월 3일에 파문을 받았다.

   루터 문제는 이제 정치문제로 번져 1521년의 보름스 국회에서 이단자로 단죄되어 추방령이 내려졌으나 전쟁의 발발로 실현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루터는 반(反)교회적 개혁 저술 활동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널리 전파하였다. 1526년에 이르러 황제는 독일종교문제를 정치적으로 타결하기 위해 국회를 열었지만 루터를 지지하던 제후들은 반기를 들어 일어나므로 1529년에 그리스도교계는 양분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수많은 회담과 충돌을 거쳐 루터가 사망한 뒤에 1555년에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일차적 타결을 보았으나 다시 충돌이 일어나 ‘30년 전쟁’ 끝에 ‘베스트팔리아 평화회담’에서 종교 분쟁은 최종적으로 일단락되었다. 1570년에 이르러 독일 북부지방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는 루터교로 개종하였으나 그 외의 유럽지역에서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4. 유럽 대륙의 종교개혁 : 스위스에서는 츠빈글리가 자신의 성서관과 루터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취리히에서 교회설교가로 활동하면서 1519년부터 루터개혁 정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1523년에 시의회의 지지를 받아 그의 교회 개혁안을 제시하였는데 여기에는 성당 안에 있는 성화상의 제거, 수도원의 폐쇄, 국가의 교회 성직록 관리, 국가 혼인 제도의 신설, 교회 전례강복의 폐지 등이 있었다. 이에 대해 1524년에 12명의 성주들이 가톨릭 동맹을 맺고 항의하여 취리히 시의회는 일단 개혁운동을 정지하였으나 1525년부터 츠빈글리개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신 · 구교종교전쟁(카펠리전쟁)이 일어나 1531년에 츠빈글리는 전사하였고, 취리히와 남부 독일에 미치던 영향력도 점차로 약화되어 갔으며 칼빈파로 흡수되었다.

   한편 1524년에 츠빈글리가 가톨릭 동맹에 굴복하자 그의 일부 과격한 추종자들은 반발하였다. 그들은 ‘신앙에 의한 의화’라는 개혁교리를 실현하기 위해서 자유롭게 신상을 받을 수 있는 성인이 되어야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유아의 세례를 금지하고 성인(成人)의 재세례를 주장하였다. 1525년에 취리히 시의회는 재세례파집회를 금지하고 이들을 박해, 추방하였다. 추방된 재세례파는 서북부 독일네덜란드로 자리를 옮겨 세력을 확장하였으나 교회와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다가 1535년에 뮌스터에서 지도자들이 처형됨으로써 재세례파가 건설하려는 그리스도 왕국은 종지부를 찍었다.

   제네바에서는 1534년 초에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론으로 ≪기독교 강요≫(1536)를 저술한 칼빈이 시의회의 지지를 받고 종교개혁에 착수하였다. 그의 과격한 신자생활의 혁신은 시민들의 반발을 받았으나 칼빈은 가혹한 처벌로 대응하므로 1555년에 이르러 모든 저항은 제거되었고, 제네바는 개혁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칼빈의 사상은 프랑스에 들어가 ‘갈리아 신앙 고백서’가 작성되었고 여기에 정치적 개입으로 위그노전쟁(1562∼1598년)이 발발하여 이는 ‘낭트 칙령’으로 칼빈파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에도 정치적 혼란 속에서 칼빈교는 성장하여 북부지방에서는 국교가 되어 개혁교회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에도 들어왔다. 당시에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한 네덜란드영국은 식민지 건설과 함께 칼빈 사상을 해외에 쉽게 확대할 수 있었다.

   5. 영국종교개혁 : 헨리 8세(1509∼1547)는 본래 루터종교개혁에 반대하면서 칠성사(七聖事)를 옹호하는 입장을 밝혔을 때에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그런데 이미 교황 율리오 2세에게 관면을 받고 과부가 된 형수인 아라곤의 가타리나결혼하였지만, 뒷날 앤 볼랜과의 사랑에 빠져 이혼하기 위해 관면의 무효성을 주장하였다. 결국 교황 글레멘스 7세와의 이혼문제에 대한 절충이 결렬되자 헨리 8세는 단독으로 이혼을 추진하여 의회로 하여금 영국 왕의 영국교회에 수위권을 인정하도록 조치하였고, 영국 성직자들에게 이러한 수위권에 굴복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로써 영국교회는 가톨릭 교회와 분리되었다. 1533년부터 로마 교회에 충실한 성직자수도자에 대해 박해를 가하였고 수도원을 폐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루터나 칼빈의 종교개혁에 동조하지 않고 ‘6개 신앙 조항’을 공포하여 가톨릭 교회교리와 실천을 준수하였다.

   헨리 8세를 계승한 에드워드 6세(1547∼1553)는 10세의 어린 왕이었기 때문에 외삼촌 에드워드 세이모어(Edward Seymour)가 섭정을 하면서 칼빈 사상을 영국 교회에 도입하여 교회개혁에 착수하였다. 1547년에 가톨릭 교회의 칠성사가 거부되고 ‘6개 신앙 조항’이 파기되었다. 1548년에는 성직자독신제가 폐지되었고, 1553년에는 영국 교회의 ‘42개 신앙조항’이 반포되었다. 이제 영국성공회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에드워드 6세가 1553년에 사망한 뒤에 가타리나의 소생인 메리가 왕위에 올랐다. 메리는 매우 환상적 가톨릭 신자였다. 그가 등극하게 된 것은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자행된 섭정 독재정치를 종식하고 전통적 튜더(Tudor)왕가의 계승을 의회와 국민이 갈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리는 이를 오해하여 국민이 여왕의 가톨릭 신앙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그는 1554년에 스페인의 국왕 필리페 2세와 결혼함으로써 영국의 민족적 자존심과 국가의 명예를 손상시켜 의회와 국민의 강력한 반대를 받아 점차로 국민의 신망을 잃었다. 그래서 메리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잔인한 보복행위를 감행하였다. 아울러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을 화형에 처하면서 개신교도들을 박해하였다. 결국 1558년에 메리는 사망하였고, 이로써 영국에서의 가톨릭 부활희망은 사라지고 오히려 프로테스탄트가 견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메리를 계승한 엘리자베드 1세(1558∼1603)는 볼랜의 딸이다. 그는 그의 어머니와 헨리 8세의 결혼을 단죄한 이유로 로마 교황청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지만 가톨릭 신앙 때문에 어느 누구도 박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자베드의 치하에서 영국교회는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새로운 영국 성공회교계제도를 설정하였다.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박해는 교황 비오 5세가 1570년에 엘리자베드 여왕을 파문하였을 때에 심각하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제 영국 성공회는 대륙의 어느 개신교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대륙의 개신교도가 박해로 피난하게 될 때에 피난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金聖奉)

   [참고문헌] Owen Chadwick, The Reformation, Harmondsworth 1968 / Harold Grimm, The Reformation Era 1500-1650, 2nd ed., New Your, London 1973 / John M. Todd, Reformation, London 1972 / Thomas M. Lindsay, A History of the Reformation, 2 vols. (2nd ed.); Edinburgh 1963 / E.G. LEonard, Reformation, Paris 1969 / H. Tuchle, C.A. Bouman, J. Le Brun, Reforme et contre-Reformation, Paris, 1968 / H. Daniel-Rops, L'Eglise de las Renaissance et de la Reforme, Paris 1955 / Joseph Lortz, Die Reformation in Deutschland, 2 vols. Freiburg I. Br. 1939∼1940 / Erwin Iserloh, Joseph Glazik, Hubert Jedin, Reformation. Katholische Reform und Gegenreformation, Freiburg I. Br., Basel, Wien, 1962 / Franz Lau, Reformationsgeschichte 1532 bis 1555, Gottingen Zurich 1964 / 金聖奉, 종교개혁의 역사적 원인, 역사안의 교회, 서울 1984.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