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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인쇄

한자 黃嗣永

   황사영(1775∼1801). 1. 인물 : 교회창설 초기 지도적 신도중의 하나이며 순교자. 자는 덕소(德紹),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남인(南人) 명문의 출신이다. 부친 황석범(黃錫範)과 모친 이씨(李氏)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정5품 정랑직(正郞職)을 역임한 바 있으며, 모친은 이동욱(李東郁)과 8촌간인 이동운(李東運)의 딸이다. 그는 1790년(正祖 14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정조(正祖)의 특별한 격려를 받았고, 정조가 그의 손을 잡아주기까지 하였으므로 그는 이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손목을 명주로 감고 다녔다 한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직후 정약용(丁若鏞)의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딸 명련(命連, 마리아)과 결혼하였다. 그는 1791년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았으며 정약종(丁若鍾), 홍낙민(洪樂敏)과 함께 천주교 신앙에 관하여 진지한 토론을 한 후, 알렉시오(Alexius)란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하였다. 그의 영세 직후인 1791년 10월(음)에 신해박해(辛亥迫害)가 발생하여, 그의 많은 친척과 친우들이 천주교를 배척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를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救世之良藥)으로 확신하며, 조상에 대한 제사를 포기하고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조상에 대한 제사의 포기는 관직에의 진출을 단념함을 뜻하는 일이었다. 그는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주 신부최인길(崔仁吉)의 집에서 만난 후 주 신부의 측근인으로 활동하였고, 주 신부가 조직한 명도회(明道會)의 주요 회원이 되었다. 즉 그는 남송로(南松老), 최태산(崔太山), 손인원(孫仁遠), 조신행(趙信行), 이재신(李在信) 등 5인과 함께 명도회의 단위 조직 중 하나를 구성하여 이를 인도하고 있었다. 앞날이 촉망되던 양반인 그가 대부분이 양인이었던 이들과 함께 어울려 신앙생활을 다져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는 1796년 이승훈, 홍낙민, 유관검(柳觀儉), 권일신(權日身) 그리고 최창현(崔昌顯) 등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주문모 신부와 협의하여 북경의 주교에게 해로(海路)를 통한 서양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하였다. 청년 황사영이 이와 같은 당시 교회의 극비상황에 간여하고 있음을 보면, 교회 내에서 그의 위치가 상당히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798년 이후 자신의 향리인 경기도 고양(高揚)을 떠나 서울에 이주하여 애오개[阿峴洞], 북촌(北村)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신도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지냈고,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며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직전에는 가장 활동적인 교회지도자로 부상되어 나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약종 등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도 내려졌다. 그는 1801년 2월(음) 초순 체포를 피하여 서울 도성(都城) 안을 전전하다가 상복(喪服)으로 변장하고, 스스로는 이상인(李喪人)이라 자처하며 피신 중에 만난 김한빈(金漢彬)을 따라 충청도 배론[舟論]으로 피신하였다. 김한빈은 전라도 고산(高山) 출신으로 충청도 청양(淸陽)에 이주했다가 서울로 다시 옮기어 살던 중 신유박해를 만난 인물이다. 김한빈은 충청도 청양인(淸陽人) 김귀동(金貴同)이 지방에서 일어났던 박해를 피애 제천(堤川)에 피신하고 있음을 알았으므로 황사영을 김한빈의 처소로 인도했던 것이다. 제천으로 피신한 황사영은 김귀동의 집에서 은거하며, 자신이 겪은 박해상황을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김한빈을 1801년 3월(음) 서울로 보내 박해의 진행과정을 알아오게 하였다. 그는 제천에서 교회의 재건방안을 생각하거나, 시작(詩作)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이 때 그가 작성한 기록들은 ‘백서’(帛書)를 쓰는데 있어서 기본적 자료가 되었다. 한편 박해를 피해 떠돌아 다니던 황심(黃沁)은 김한빈이 제천으로 떠났음을 탐문하고서 김한빈만나기 위해 제천으로 왔다. 황심은 이미 1798년과 1799년 쇄마구인(刷馬驅人)의 명색으로 북경에 가서 주문모 신부의 서한을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했던 인물이었다. 8월 26일(음) 황심만나 황사영은 박해의 경과와 교회의 재건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비단에 적어 북경 주교에게 발송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이 백서는 황심의 체포로 인해 사전에 발각되었으며, 황사영 자신도 1801년 11월 5일(음)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에 소재해 있는 것으로 최근 확인되었다. 한편, 그의 처형 이후 황사영이 소유했던 가산은 적몰(籍沒)되었고 그의 노비(奴婢) 5인은 관노비로(官奴婢)로 몰수되었다. 그리고 그의 숙부 황석필(黃錫弼)은 경흥(慶興)으로 정배되었으며, 그의 처 정명련은 제주도 대정군에 정배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황경한(黃景漢)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나 추자도(秋子島)에 정배되었다가 하(下)추자도 예초리에서 성장하였다.

   2.황사영 백서 : 백서는 비단에 씌어진 글을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황사영 백서>는 1801년 당시 천주교회의 박해현황과 그에 대한 대책 등을 북경의 주교에게 건의 보고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압수당한 비밀문서이다. <황사영 백서>는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명주에 작은 붓글씨로 씌어진 것인데, 모두 122행 1만 3,3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 이 백서는 ‘서론’, ‘본론’, ‘결론, 대안제시’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론’은 1행부터 6행까지로서, 여기에서는 1785년 이후 교회의 사정과 박해의 발생에 관해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본론’은 7행부터 90행까지로서 전체 분량 중 거의 70%에 해당된다. 본론에서는 신유박해의 전개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특히 황사영은 여기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했거나 전해들은 교회관계 사건들을 정리해서 보고하고 있다. 즉 그는 최필공, 이중배, 김건순, 권철신, 이안정, 이가환, 강완숙, 최필제, 오석충, 정약종, 임대인, 최창현, 홍교만, 홍낙민, 이승훈, 김백순, 이희영, 홍필주, 조용삼, 이존창, 유항검, 윤지헌 등의 체포와 죽음을 증언하고 있으며,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자수 및 죽음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밝혀 주고 있다. 한편, 91행 이하의 ‘결론’ 내지 ‘대안제시’의 부분에서는 먼저 박해로 인한 교회의 피폐상과 박해의 종식에 관한 강한 열망을 표현해 주었다. 그리고 청국교회와의 연락을 쉽게 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이에 이어서 신앙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하고 있다. 즉 그는 조선의 종주국인 청(淸)의 위력에 의존하여 신앙자유를 얻는 방안을 먼저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청국이 종주권(宗主權)을 행사하여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조선이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 주기를 요청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청국의 감호(監護)를 요청하며, 조선을 청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조선에서도 북경에서처럼 선교사의 활동을 보장받아 보기를 희망하였다. 또한 그는 서양의 무력시위를 통해 신앙자유를 얻는 방안도 제시하였다. 즉 그는 서양의 배 수백 척과 병사 5, 6만명을 동원하여 조선에 신앙자유를 허락하도록 강박해 주기희망하였다. 이어서 그는 박해로 인해 교회의 규칙을 지킬 수 없음을 호소하며 대소재(大小齋)의 관면을 청하는 내용의 글로 백서를 끝맺고 있다. 이 백서의 발신자는 황심 도마(多默)로 되어 있다. 황심은 이미 조선교회의 편지를 북경주교에게 전달한 바 있었던 인물이므로, 황사영은 그의 이름을 빌어 조선교회의 사정을 보고하고 대책의 마련을 호소하고자 하였다. 백서가 작성된 곳은 배론김귀동 가(家)였다. 그가 백서에 씌어진 사실들을 수집 정리하고 구상하기 시작한 때는 자신이 배론으로 피신했던 1801년 2월(음) 전후로 파악된다. 그는 피신 중 박해에 관한 사실을 김한빈 등을 통해 계속 수집하였고 이를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26일(음) 황심만나게 되자 그날 밤 이를 최종적으로 정리하여 황심 편에 북경으로 발송하려다 미수에 그쳤던 것이다. <황사영 백서>는 1801년 압수된 이후 의금부에서 계속 보관해 오다가 1894년 옛 문서들을 파기할 때 그 원본이 우연히 발견되어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뮈텔 주교는 1925년 7월 5일(음) 로마에서 거행된 조선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 때 이 자료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선물하였고,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백서의 사본은 발각 당시부터 작성되기 시작해서 ≪벽위편≫(闢衛編), ≪신유사학죄인 사영 등 추안≫(辛酉邪學罪人嗣永等推案)을 비롯한 몇몇 자료에 재수록되어 있다. 한편 뮈텔 주교는 백서의 원본을 로마로 발송하기 이전 이를 실물 크기대로 동판에 담아 인쇄하여 학계에 배포하였다. 또한 한국 교회사연구소에서는 1966년 이를 활판본으로 간행하였다. <황사영 백서>의 번역본은 1925년 뮈텔프랑스어 역본(譯本), 1946년 야마구찌 마사유끼(山口正之)의 일본어 번역본, 1976년 정음사에서 간행한 윤재영(尹在瑛)의 한굴번역본 등이 있다.

   황사영은 “천주교 신앙이 백성과 나라에 해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정에서 이를 반드시 금지시키고자 하니, 천주교를 힘써 지켜보고자 하는 의도”(邪學罪人嗣永等推案)로 이 백서를 작성하였다. 그는 박해로 인해 죽어간 자신의 동료들에 관한 기록을 철저히 남기어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를 바랐다. 또한 그는 박해의 상황을 철저히 기록해서 전달함으로써 조선교회의 재건에 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본론’의 기록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징 때문에 <황사영 백서>는 신유박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그는 ‘대안제시’의 부분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 주었다. 1801년 당시 조선의 사회에서는 청나라의 정통성과 문화를 부인하는 북벌론적(北伐論的) 배청감정(排淸感情)과 함께, 청국의 문물을 적극적 주체적으로 수용하려는 북학론(北學論)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신앙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방안으로 조선을 청국에 종속시켜 보고자 하였다. 그의 이 발상은 북벌론자는 물론이고 북학론자에게도 수용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또한 그는 서양선박과 병력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그의 발상을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서양선박과 선교사의 파송을 요청한 바 있었던 초기 교회의 경험에, 박해라는 극한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무력의 요소가 결부되어 제시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사회에 널리 유행되고 있던 해상세력(海上勢力)의 조선침략에 관한 위기의식과도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발상은 달레(Dallet)의 표현대로 “지나친 상상에서 나온 유치한 계획이며, 저 시대에 있어서의 한 몽상(夢想)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급박한 박해의 상황 때문에, 조선왕조가 존재하는 한 신앙자유의 획득이나, 자신을 포함한 신도들의 생명유지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조선왕조의 존재를 부정해 보려는 ‘몽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대안제시’가 ‘몽상’의 일종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이 ‘몽상’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고, 이 ‘몽상’은 그의 죽음에 있어서 직접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황사영의 ‘대안제시’를 반민족적 행위로 규탄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 민족주의가 성립되지 않았던 상황 아래서 제시되었던 그의 ‘몽상’을 반민족주의로 규정하는 데에는 재고가 요청된다. 그러나 그의 ‘대안제시’는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는 신앙자유라는 좋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 국가생존권의 부정이라는 좋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3. 황사영 백서사건 : <황사영 백서>가 발각됨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천주교탄압 사건으로서, 신유박해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된다. 이로써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처형 이후 소강상태에 들어갔던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크게 일어났다. 1801년 9월 26일(음) 황사영이 체포됨으로써 이 사건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이들의 체포에 앞서 황심과 가까웠던 옥천희(玉千禧)가 체포되어 이들을 함께 국문하게 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직후 황심, 옥천희, 김한빈 등 관련인들은 형조에서 취조를 받았고, 사건의 주범인 황사영은 의금부에 구금되었다. 황사영에 대한 신문은 10월 9일(음)에 시작되었다. 그의 신문이 체포 이후 10여일간 지체되었던 것은 사건의 중요성으로 인해 이 사건과의 관련사항을 파악하고 사건에 대한 대안을 사전에 마련하려 했기 때문이다. 신문은 주로 ‘대안제시’의 반역적 요소를 추궁하는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황사영 개인 및 그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을 찾아내려 하였고, 백서의 사본이 청국에 전달되었을 가능성 등을 집중적으로 신문하였다. 신문의 결과 황심김한빈은 10월 23일(음)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황심에게 적용된 죄명은 모역동참죄(謀逆同參罪)였으며, 김한빈은 지정은장죄(知情隱藏罪)가 적용되었다. 그리고 11월 5일(음) 이사건의 중심인물인 황사영은 궁흉극악 대역부도죄(窮凶極惡大逆不道罪)로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다. 또한 김귀동 및 그 밖의 관계자와 가족들이 처벌됨으로써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한편, 조선 조정에서는 1801년 10월(음)에 파견된 동지사에게 천주교 탄압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진주사(陳奏使)의 임무도 부여해주었다. 이때 파견된 진주사 조윤대(曺允大)일행은 토사주문(討邪奏文)과 함께 <황사영 백서>의 내용을 16행 923자로 축소하여 청국의 예부(禮部)에 보고하였다. 이 축소본을 흔히 <가백서>(假帛書)라 부르고 있다. 이 가백서에는 청국의 조선 감호책(監護策)이나 종주권(宗主權) 발동 등에 관한 내용은 완전 삭제시켰으며, 서양선박의 요청사실과, 월경통신(越境通信) 등의 사실을 이조흉계(二條凶計)로 지적하였다. <황사영 백서>가 발각된 이후 청국인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이 청국에 알려질 가능성이 높다고 조정에서는 판단하게 되었다. 이에 조선정부는 진주사를 파견하여 신유박해 전반에 관한 청국의 이해를 촉구하고, 주문모 신부의 처형에 따를 수 있는 청국측의 반발을 예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진주사 조윤대의 파견은 <황사영 백서> 사건을 외교적 측면에서도 마무리짓는 것이었다. (趙珖)

   [참고문헌] 黃嗣永帛書, 한국교회사연구소, 1976 / 辛酉邪學罪人嗣永等推案 / 李基慶, 闢衛編, 曙光社, 1978 / 李晩采, 闢衛編, 闢衛社, 1931 / 邪學懲義, 弗咸文化社, 1977 / 尹在瑛譯, 黃嗣永帛書外, 正音社, 1967 / 山口正之, 黃嗣永帛書の 硏究, 全國書房, 大阪 1946 / 趙珖, 黃嗣永帛書의 社會思想的 背景, 史叢, 高麗大 史學會, 1977.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