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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어, 외국어, 관련어, 문장으로 검색하세요. 예)부활,사순 시기, liturgy, Missa, 천사와 악마, 종부성사, 그리스도의 탄생,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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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敎會史
라틴어 historia Ecclesiae
영어 history of Church

   가톨릭 교회의 역사는 30년경 유태교의 축제일인 오순절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베드로를 중심으로 군중 앞에 나아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면서 구약의 메시아(구세주)에 대한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러한 복음 선포를 경청하여 받아들인 이들이 사도들을 중심으로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를 형성하셨다. 초창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할손례, 정화례, 안식일 등의 유태인의 종교적 의무를 성실하게 준수하는 유태교 종파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특수한 공동체를 이루고 고유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사도단과 그 밑에 야고보를 중심으로 하는 장로단과 스테파노를 지도자로 하는 부제단이 구성 되었다. 사도들의 열성적 선교활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루살렘 밖으로 전파되었다. 이 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두 그룹이 공존하였는데, 하나는 아직도 엄격한 유대 사상을 보존하면서 실천하던 유대지방의 예루살렘 교회, 갈릴래아 교회, 사마리아 교회, 요르단강 서안 지역의 교회 등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이며, 다른 하나는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교회와 안티오키아 교회, 로마 교회 등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서 이는 개종한 그리스인, 헬레니스트, 기타 비유태인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과격한 유대 민족주의의 등장과 바울로 사도의 선교 활동으로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장하였고, 70년 예루살렘의 멸망 후에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쇠미하였다.

   2세기에 이르러 12사도들이 모두 사망함으로써 계시의 사도시대가 끝나고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후시대에 전달하는 사도후시대(100~300)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다시 사도교부시대(100~150), 호교교부시대(150~200), 초대교부시대(200~300)로 구분되고 있다. 이 시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교회 관습은 아직도 유태교적 또는 유대계 그리스도교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둘째로 교계제도가 최종적으로 확립되어 주교, 장로(신부), 부제 등의 세 성직계급이 등장하였다. 넷째로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로마제국의 영토 확장에 따라서 널리 전파되어 교세가 급속적으로 성장하였다. 다섯째로 이러한 교세 확장으로 그리스도교로마제국의 황제들에게 정치적 불안감을 안겨 주어 200년간의 박해를 받았다.

   4세기 초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등장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종식되었고, 313년에 밀라노칙령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신앙의 자유를 얻었으며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이후로 그리스도교로마제국의 황제들의 호의적 도움을 받으며 세계적 종교로 성장하였다. 마침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92년에 포고령을 통해서 그리스도교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였다. 이러한 국교 시대를 맞이하여 그리스도교는 여러 분야에서 발전하였다. 첫째로 수도원이 창설되어 발전하면서 수도생활은 일반 신자들의 영성강화에 도움을 주었다. 둘째로 공의회그리스도교의 주요한 조직으로 등장하여 교회의 모든 현안문제를 해결하거나 결정하였다. 셋째로 신앙생활의 활성화와 함께 전례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 밖에 국교 시대에 그리스도교는 정통과 이단 사이의 격렬한 교리 논쟁으로 분열되었다. 당시의 신학적 쟁점은 천주성삼(삼위일체), 그리스도, 인간구원에 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교리 논쟁은 일련의 공의회를 통해서 해결되어 최종적으로 정통 가톨릭 교리가 정립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5세기 중반기에 국경지대의 게르만민족이 이동하면서 로마제국을 멸망시키자 그리스도교 자체도 붕괴될 위험에 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본래의 사명인 선교의 열의를 잃지 않고 유럽 세계의 새 주인으로 등장하는 게르만민족을 개종시켰다. 특히 서부 게르만 계통의 프랑크족의 개종유럽사에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문화권과 게르만민족이 융합하여 새로운 중세 문화를 탄생시켰고,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고유한 민족적 특성을 지니면서 같은 신앙 위에서 일치된 중세기 그리스도교회의 기원이 되었다.

   게르만민족의 이동과 프랑크왕국과 교황청의 융합이라는 과도기(450~750)를 거쳐서 시작되는 중세기(750~1300)는 시대적으로 양분될 수 있다.

   중세 전기(750~1054)에는 프랑크왕국을 중심으로 서구 그리스도교 제국이 창설되었고 종교적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교 교세의 확장과 교황령의 탄생 등의 외적 발전이 이룩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로부터 물질적 혜택을 받은 반면에 황제의 내정 간섭을 받아 교회의 세속화와 교권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교회와 국가가 밀착된 관계로 프랑크제국의 정치적 붕괴는 교회의 권위와 교황의 권한이 쇠퇴하는 교회의 암흑기(880~1046)를 탄생시켰다. 암흑기 동안에 그리스토교는 처음에(800~962) 로마 귀족의 지배를 받았고, 후에는(962~1046) 독일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교회 내정 간섭으로 자율권을 상실하였다. 아울러 교리 논쟁 이후로 서방 라틴 교회와 동방 비잔틴교회가 각기 다른 노선으로 발전하였다. 8세기에 동방 교회성화상 파괴 논쟁을 통해서 서방 교회신학적 충돌을 하였고 1054년에 두 교회는 완전히 결별하였다.

   중세 후기(1054~1300)에는 클뤼니 수도단체의 개혁과 교황 그레고리오 7세(재위 : 1073~1085)의 교회쇄신으로 교회는 세속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권을 회복할 뿐 아니라 세속권을 지배하는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두 가지 개혁운동은 성직자수도자를 각성시켰고 평신도영성 강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는 11세기에 시작된 십자군 운동과 청빈운동에서 나타났다. 십자군운동은 기사 수도회의 탄생과 서구의 비잔틴문화와 이슬람문화의 접촉을 가능케 함으로써 학문, 특히 스콜라철학신학과 예술의 발달에 이바지하였다. 청빈운동은 교회의 생활 혁신을 불러 일으켰으나 지나친 주장은 이단으로 변질되었으며 이러한 이단운동을 저지하기 위해서 부정적 방법으로 종교재판이 생겨났고 긍정적 입장에서 탁발수도회가 창설되었다. 탁발수도회이단자의 개종선교활동 이외에 13세기에 설립되기 시작한 대학에서 학술활동을 통해서 문화 발달에 공헌하였다.

   14~15세기(1300~1500)에 있어서 유럽그리스도교 세계는 중앙집권의 정치체제 또는 지방 분권화의 정치적 상황으로 단일성을 상실하였다. 또한 교회는 일련의 불행한 대사건, 즉 교황청의 아비뇽 천도와 대분규(서구의 대이교)로 인한 교황권의 약화로 말미암아 공의회 우위사상의 흐름 속에서 이단운동이 발생하여 혼란 속에 빠졌다. 더욱이 신학자유주의신학의 불확실성시대를 초래하였고, 이는 신학자들의 대립과 이에 따른 신학의 쇠퇴를 가져왔다. 교회생활에 있어서도 일부 르네상스 교황들은 문화적 업적을 쌓았지만 그들의 시대적 사명, 즉 교회 쇄신작업에 소홀하였으며 귀족 출신인 고위 성직자들도 그들의 영신적 사명을 망각하였다. 한편 일반 대중의 신심생활은 매우 활발하였으며, 이는 수많은 성당의 건립, 자선활동, 신심서의 보급 확대, 모국어성서의 번역, 새로운 신심의 번창(로사리오 기도, 십자가의 길, 삼종 기도, 성지 순례성인성해공경)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 시대의 신심은 개인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고 현세적 두려움을 피하고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데 치중하여 미신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 비난과 함께 개혁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지기에 이르렀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성 아우구스티노 은수사회의 수사 신부이며, 성서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대사 남용에 대해 항의하면서 대사 교리의 재정립을 제의하기 위해 그의 교구장과 동료 교수 · 신부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는 유명한 ‘95개조항의 신학 명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전통신앙의 기저를 뒤흔들어 놓았으며 그리스도교계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분열시키는 종교 개혁시대(1500~1650)를 열었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독일루터 종교 개혁을 위시하여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의 종교개혁과 칼빈의 종교개혁, 그리고 재세례파의 급진적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국교회가 탄생하였다.

   한편 가톨릭도 15세기초부터 교회 쇄신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그 실현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던 중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자극을 받아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콘스탄스 공의회(1414~1417년)와 바젤 공의회(1413~1491년)에서 교회 쇄신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었고, 르네상스 교황들도 산발적으로 교회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모두 좌절되거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교황들과 교황청에 이를 시행할 만한 내적 및 종교적 역량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회 쇄신을 위한 공의회의 개최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졌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 1523~1534)는 공의회 소집을 주저하였다. 그 이유는 교황이 공의회주의, 즉 공의회우위 사상의 재등장을 우려하였고 교황령에 대해 더욱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527년 5월에 발생한 ‘로마의 함락’ 사건은 교황 바오로 3세(재위 : 1534~1549)에게 교회의 반성과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몇 차례의 연기를 거쳐 1545년 12월에 가톨릭의 교회 쇄신 공의회는 트리엔트에서 개최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는 퇴락된 교회에 대해 반성하면서 신앙교리를 재정리하고 교회 규율을 혁신하였다. 공의회 이후에 가톨릭 교회는 교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성립되면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지방 교회와 수도원에서 교회 쇄신에 착수하였다. 트리엔트 개혁 정신은 선교활동에서도 나타났다. 종교개혁 이전까지 ‘유럽의 종교’로 머물러 있었던 가톨릭 교회는 교회 쇄신의 일환으로 이베리아반도의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스페인의 신대륙 탐험을 통해서 세계 선교에 나섰다.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등의 수도회예수회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사아에서 선교활동에 종사하였다. 이제 가톨릭 교회는 동서양에 걸쳐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적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유럽에서 가톨릭교회는 여러 측면에서 도전을 받았다. 첫째로 정치적인 면에서 국가지상주의와 이에 따른 국교회 사상은 특히 프랑스(갈리아주의), 독일(페브로니오사상), 오스트리아(요셉주의)에서 가톨릭 교회를 괴롭혔다. 둘째로 종교적 측면에서 외적으로 경건주의와 엄격주의를 내세우면서 내면으로는 가톨릭 정통 신학을 반대하던 이단운동인 얀세니즘은 교회를 혼란 속에 빠뜨렸다. 셋째로 사상적 측면에서 근세의 새로운 사상으로 등장한 계몽주의신학적 합리주의를 탄생시켜 자연종교, 이신론, 종교적 보편주의는 가톨릭신학에 전면 도전하였다.

   마침내 19세기에 이르러 계몽주의는 외적으로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켜 가톨릭 교회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일부 유럽지역에서 그 권위를 상실하였고 세속화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세속화는 교회가 자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교황청과 지방 교회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교황청의 승리를 안겨 주었다. 교회는 반가톨릭적 국가에서 단결되었고 국가지상주의와 국교회 사상에 강력하게 도전하는 운동(교황지상주의)을 일으켰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기에 일어난 가톨릭 자유주의는 교회를 내적 혼란 속에 휩싸이게 하였으나 신앙 오류표(Syllabus)의 반포로 인해 외적으로 평온에 들어갔다. 또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권에 대한 신조결정으로 분열되어 독일에서는 ‘구가톨릭 교회’가 떨어져 나갔으며 이른바 ‘문화 투쟁’으로 교회는 일시적으로 난관에 봉착하였으나 가톨릭인의 단합으로 결국은 승리하였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상처받은 교황의 권위를 회복하였으며 가난해진 교회는 근로대중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교황 레오 13세(재위 : 1878~1903)는 1891년에 ‘가톨릭 사회주의의 대헌장’ 또는 ‘노동헌장’이라 불리는 칙서 <새로운 사태>를 반포하여 근로 대중을 위한 사회의 개선을 요구하였다. 이 칙서는 널리 유포되기 시작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운동을 어느 정도 저지하고 그리스도교 노동조합을 창설, 발전시키며 가톨릭 정신이 구현되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그리스도교정당을 탄생시켰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우선 성직자 중심의 교회 체제에서 벗어나 평신도의 지위와 사명이 부각되었으며 ‘평신도 신학’이 정립되어 성직자평신도가 교회에 대해 함께 책임을 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20세기 가톨릭 교회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교황 요한 23세(재위 : 1958~1963)가 소집하여 교황 바오로 6세(재위 : 1963~1978)가 마무리 지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이다. 1959년에 교황 요한 23세는 교회를 내적으로 쇄신하고 외적으로는 문호를 개방하여 그리스도교 세계의 일치를 촉진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하고 교회법을 개정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 계획은 3년 동안의 공의회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었으며, 1983년에 새로운 교회법이 선포되어 1984년에 발효하게 되었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는 급변하는 현대 세계에 적응하는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하는 동시에 다른 그리스도교와의 일치를 위해서 계속 노력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그리스도교 종교들과도 폭넓은 대화의 길을 모색, 진행하고 있다.

   폴란드 출신의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재위 : 1978~ )의 등장은 가톨릭 교회의 획기적 사건이었다. 455년 동안의 전통을 깨뜨리고 이탈리아인이 아닌 교황이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현대 가톨릭 교회의 세계화와 더불어 미래 세계를 향한 교회의 획기적 방향을 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金聖泰)

   [참고문헌] Louis J. Rogier, Roger Aubert, M. David Knowles(edd.), Christian Centuries: A New History of the Catholic Church, v.5, London, New York 1964 / Thomas Bokenkotter, A Concise History of the Catholic Church(rev.), New York 1979 / 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revised by Robert T. Handy(3rd ed.), Edinburgh 1976 / Kenneth Scott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ity, 2vols. (rev.), New York, Evanston, San Francisco, London 1975 / Owen Chadwick(ed.), The Pelican History of the Church, 6vols, Harmondsworth 1967-1971 / J.B. Duroselle, E. Jarry(edd.), Histoire de l'Eglise depuis les origines jusqu'a nos jours, 26vols. Paris 1938-1963 / Charles Poulet, Histoire de l'Eglise, 3vols. (rev.), Paris 1959-1962 / H. Daniel-Rops, Histoire de l'Eglise de Christ, 10vols. Paris 1948-1968 / K. Bihlmeyer, H. Tuchle, Kirchengeschichte, 3vols.(18th ed.), Paderborn 1962-1966 / Hubert Jedin(ed.), Handbuch der Kirchengeschichte, 6vols., Freiburg i. Br., Basel, Wine 1962-1971 / Joseph Lortz, Geschichte der Kirche in ideengeschichtlicher Betratung, 2vols.(21th rev.), Munster 1962-1964 / August Franzen, Kleine Kirchengeschichte(3rd ed.), Freiburg i. Br., Bacel, Wien 1970 / 최석우 역, 敎會史, 분도출판사, 1982.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