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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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남◆ 인쇄

한자 盧基南

   노기남(1902~1984). 최초의 한국인 주교. 제10대 서울교구장. 세례명 바오로. 8.15광복 전후의 격동기에 한국인 최초의 주교로서 한국 천주교회를 슬기롭게 영도하여 오늘의 반석위에 올려놓은 한국 가톨릭공로자이다. 그는 평안남도 중화군 율리면 무진리(中和郡 栗里面 戊辰里)에서 독실한 천주교인인 아버지 노성구(盧成九, 요한)와 어머니 황(黃)씨(비비안나) 사이에서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신앙심이 깊은 환경에서 자라난 그는 어려서부터 글방에서 한문을 공부하는 한편 교리공부도 열심히 하여 신부가 되고 싶은 꿈에 젖었다. 1917년 9월 용산 성심신학교에 들어가, 우수한 성적으로 대신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1930년 10월 26일 사제서품을 받고 이어 종현(오늘의 명동)성당의 보좌신부로 임명되었다. 이후 보좌신부로서 계성(啓星)보통학교(지금의 계성여고)의 설립자 대리가 되어 종교교육에 헌신하는 한편 본당의 청소년을 맡아 지도하고, 합창단을 창설하는 등 교회발전과 계몽운동에 앞장서서 노력하였다.

   일제말기(日帝末期)에 이르러 조선총독부의 종교탄압정책이 더욱 노골화되면서 한국에 있는 외국인 교구장을 모두 일본인으로 바꾸려 하자, 당시의 서울교구장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는 사임을 결심하고 후임자로 노기남 신부를 비밀리에 로마교황청에 추천함으로써 1942년 1월 4일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서울교구장 서리로 임명되는 한편 평양 · 춘천 양 교구장 서리로 임명되었다. 교구장 서리고 착좌한 지 한 달도 못 되는 1942년 2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용산 성심신학교를 즉각 폐교하라는 통고를 받고, 서울에 있는 대신학생들을 덕원신학교로 옮겨 공부를 계속하게 하였다. 또 신사참배(神社參拜) 문제로 들볶인 그는 1942년 3월 일본에 가서 동경에 주재하는 교황사절 마렐라 대주교와 동경 대교구장 도이(土井) 대주교와도 대책을 협의하였다. 1942년 11월 10일에는 서울교구장 서리에서 정식 교구장[代牧]으로 임명되어 콜바사(Colbasa) 명의 주교가 되었다. 그리고 1942년 12월 20일 명동대성당에서 주교 성성식(成聖式)을 가졌다. 그는 일제의 강제로 감금되어 있는 35명의 프랑스성직자아일랜드성직자들을 보호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그 공로로 1962년 프랑스정부로부터 최고문화훈장인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를 수여받았다).

   광복이 되자, 노주교는 1945년 8월 17일 모든 성직자교우들에게 축복을 내림과 동시에 고유(告諭)를 발표하여 “혼란된 정세 아래서 각기 자중하고, 앞으로 세워질 우리 정부가 순조롭도록 천주 성신의 도움을 비는 뜻으로 매일 특별한 기도를 드리라”고 지시하였다. 그는 광복직후의 혼란 속에서도 교회재건에 심혈을 기울여 급속한 교회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 9월 9일 한국에 진주(進駐)한 미군과 함께 찾아온 스펠만(Spellman, 후에 추기경이 됨) 대주교를 맞아 명동성당에서 한미친선 특별미사를 올리고, 미군 환영미사를 봉헌하는 등 한국의 조속한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하고, 이승만(李承晩) · 김구(金九) 등 해외에서 돌아온 독립지사들과도 교류 협조하였다.

   1946년에는 일제 때 폐간당했던 교회기관지 <경향잡지>와 <가톨릭 청년>을 복간(復刊)하고, 일간지 <경향신문>을 창간하여 반공사상을 고취, 좌익세력의 발호를 견제하였다. 그는 1946년 9월에 전국 교구장회의를 열고 한국 순교자현양회를 창설하여 순교지인 한강 새남터에 순교기념탑을 건립하는 등 순교자 현양사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6.25동란이 발발하자, 자유진영의 적극적인 원조를 호소하고, 1950년 11월 유엔군의 북진(北進)을 따라 평양을 방문, 교회의 재건에 힘썼다. 1951년 2월 ‘군종제도’를 발족시켜 ‘가톨릭군종신부단’을 창설하였다. 1953년에 그는 전국의 교구장으로 구성된 ‘천주교 중앙위원회’를 발족시켜 총재로 취임하고, 신학교와 병원 등 여러 교회기관을 신설하여 교세를 크게 신장시켰다. 그해 7월 휴전협정이 맺어진 후, 한국 교회의 장래를 위하여 유럽, 캐나다 등지에 30여명의 신부, 신학생, 평신도를 유학시켜 인재양성에 힘썼다. 1955년 노주교는 미국과 유럽 등지를 순방하면서 전쟁피해를 복구하고, 교회사회의 재건을 위한 적극적인 원조를 호소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자유당정권이 말기에 접어들어 독재와 부정 · 부패가 날로 심해지는 상황에서 그는 <경향신문>을 통하여 민중의 편에 서서 비판을 가하고 민주정치의 정상화를 촉구하였다. 그래서 이무렵 바티칸으로부터 ‘정치주교’라는 말까지 나오기는 했으나, 노주교 자신은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견지하고, 교회정치참여에 비판적이었다.

   광복 수의 혼란과 전쟁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한국천주교회의 교세가 급속히 신장하자, 로마교황청은 한국 교회의 자립능력과 성숙성을 인정, 1962년 3월 한국 교회교계제도(敎階制度)를 설정하고 서울 · 대구 · 광주의 세 관구(管區)를 설립케 하였다. 이것은 조선교구가 설정된 지 130여년, 대목구(代牧區)로서 외국의 선교단체에 의지하여 아직 포교지(布敎地)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 교회가 ‘당당한 자립교회’로 인정받은 것이요, 노주교의 영도력에 힘입은바 컸던 것이다. 노주교는 서울 대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昇品)되었다.

   1962년 10월 노대주교는 로마에서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1회기에 참석하고, 교황 요한 23세를 알현하였다. 1963년 8월 15일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다. 1963년 9월에는 바티칸 공의회 제2회기에, 1964년 9월에는 공의회 제3회기에, 1965년 9월에는 제4회기에 참석한 후, 11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하였다. 1966년 2월 이탈리아 대통령이 수여하는 Commendatore훈장을 받았다. 1966년 12월 ‘한국종교인협회’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67년 3월 23일 한국 교회의 장래를 젊은 후진에게 맡겨 주기 위하여 서울 대교구장직을 미련 없이 사임함과 동시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에 따라 그는 서울 대주교에서 Pro consulari 명의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당일로 경기도 시흥군 안양에 있는 성 라자로마을 요양원으로 거주지를 옮겨, 소외된 나환자들과 함께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이때가 65세였다. 1967년 7월에 저서 《나의 회상록》을, 1978년 6월에는 《당신의 뜻대로》가 출판되었다. 1984년 5월 6일 노대주교는 명동대성당에서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휠체어에 탄 채고 알현하는 영광을 가졌다. 그리고 한국 교회 창설 200주년을 맞는 해에 103인의 시성(諡聖)을 확인하면서 6월 25일 새벽 풍운(風雲)으로 엮어진 그의 일생을 마치고 선종하였다. 고인의 유해는 용인 가톨릭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