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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어, 외국어, 관련어, 문장으로 검색하세요. 예)부활,사순 시기, liturgy, Missa, 천사와 악마, 종부성사, 그리스도의 탄생,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 등

◆로마제국◆ 인쇄

한자 ∼帝國
라틴어 Imperium Romanum
영어 Roman Empire
독일어 Romische Kaiserreich

   그리스도교의 생성과 발전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로마제국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Augustus)에 의해 건설되어 동 · 서제국으로 분열된 후 476년 서로마제국이 먼저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동로마제국이 오스만 터키의 침입으로 멸망한 1456년까지 계속되어 서양문화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한 대제국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지방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활약하다 ‘유태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로마법에 따라 재판에 회부되어 십자가형을 받았고, 초기 교회의 발전이 로마제국의 행정구역 내에서 로마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교회사적으로도 로마제국은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로마제국의 역사기원전 8세기 이탈리아반도 중부 티베르(Tiber)강 하구의 낮은 언덕에다 이탈리아인이 세운 도시국가로부터 시작된다. 건국 초에는 전설적인 왕정(王政)이, 기원전 510년부터는 공화정(共和政)이 각각 실시되었다. 공화정 하의 로마는 중소 토지를 소유한 농민을 기반으로 하는 견실한 사회였고, 이를 기초로 하여 이탈리아반도를 통일시켰다. 세 차례의 포에니전쟁을 통한 카르타고 정복, 시리아 격파, 그리스 여러 도시의 점령으로 기원전 2세기경에는 지중해 연안을 지배하는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은 로마공화정의 발전에 기여하였던 중소 토지소유 농민을 몰락시켜 토지제도는 노예노동에 의한 대토지소유제(Latifundium)로 바뀌었고, 가혹한 노동에 반발한 노예들은 스팔타쿠스의 난(기원전 73-71년) 등을 일으켰다. 이와 동시에 이민족(異民族)의 침입과 이탈리아 동맹 때의 반란으로 사회적인 위기가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군인과 정치가들이 등장하여 주요한 관직을 독점하였고, 그라쿠스 형제개혁이 실패한 이후로는 장군들 사이에 정권 다툼이 빈번해져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정이 유명무실한 상태에서 삼두정치가 등장하였다. 이 삼두정치도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한 후 정적(正嫡) 폼페이우스를 제거하고 독제권을 장악하면서 무너졌고, 그도 공화파에 의해 암살되는 등 혼미를 거듭하였다. 그 뒤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 등과 제2 삼두정치를 시작하였으나 안토니우스가 이집트클레오파트라와 연합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대적, 악티움 해전을 벌임으로써 깨어졌다. 이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연합군을 격파하여 이집트를 평정함으로써 로마는 지중해 연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로마의 평화’(Pax Romana)시대를 열게 된다(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는 형식적으로는 공화정의 전통을 중시하여 원로원과 공동으로 통치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다. 원로원은 기원전 27년 그에게 존자(尊子)라는 의미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선사하였고, 이때부터 사실상 제정(帝政)이 실시되었다.

   소위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는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건설된 로마제국은 동으로 유프라테스강, 서로는 대서양, 북으로는 도나우강에서 라인강, 남으로는 사하라사막에 이르는 대제국이었다.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전쟁에 시달려 온 로마인들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외부 정복보다는 내정(內政)의 안정에 힘을 쏟았다. 법제를 정비하고 황제숭배사상을 도입하였으며 도로와 수도 등을 건설하였다. 14년 그가 죽고 황제 티베리우스가 즉위하면서 68년까지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조(朝)가 시작된다. 이 기간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과 죽음이 있었고, 베드로의 로마 방문도 행해진다. 이리하여 클라우디우스조의 마지막 황제인 네로(Nero) 시대에 로마 교회는 상당한 발전을 보게 된다. 이와 함께 피정복민의 종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로마제국도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박해를 가하였다. 64년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자 네로는 그리스도 교도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대박해를 감행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브리태니어, 유대 등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네로는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내란으로 1년 동안 3명의 황제가 명멸하는 사태를 빚었고 이 내란을 평정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에 의해 프라비우스조(朝)가 세워졌으며 황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의 암살로 끝났다.

   그 후 소위 5현제(五賢帝)라고 불리는 네르바(Nerva), 트라야누스(Trajanus), 하드리아누스(Hadrianus),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시대가 열렸다. 이들은 원로원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내적으로 안정을 다지고 대외정복 사업도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트라야누스제(帝) 시대에는 로마제국 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다. 대외무역과 상업도 번창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반복되었고, 1세기 말경부터 교회는 지하의 묘지(catacombs)로 숨어들기 시작한다.

   5현제시대가 끝나고 막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군벌(軍閥)들이 등장하여 권력투쟁을 벌이는 ‘군인황제시대’가 전개된다. 혼미한 정국이 계속되는 가운데 즉위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는 제국의 단결과 국민의 충성심을 강화하기 위해 국교가 필요함을 확신하고 주피터 숭배사상을 부활시켰다. 그리스도 교도들은 이를 따르지 않았고, 이러한 사실에 대해 다신론자인 황제는 4개의 칙령을 반포하여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그 뒤를 이어 갈레리우스(Galerius) 등 6명의 황제들이 권력 다툼을 전개함으로써 정국은 더욱 혼미해졌다. 이러한 정국을 바로잡은 사람들은 서부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대제와 동부의 리치니우스(Licinius)였다. 이들은 313년 밀라노에서 만나 서로 화해하기로 하였다. 아울러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소위 ‘콘스탄티누스 관용령’에 합의하면서 311년 갈레리우스가 발표한 관용령의 정신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리치니우스는 계약을 어기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재개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두 황제 사이에 대규모의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승리로 끝났다. 황제는 323년경 다음과 같은 내용의 칙령을 반포하였다. ① 주교에게 민간재판관과 동일한 권위를 부여한다. ② 재산을 교회에 양도하는 행위와 교회가 노예를 해방시키는 행위를 합법화한다. ③ 독신금지조치를 해제한다. ④ 이교도의 축제에 그리스도인의 참여를 금지한다. 이러한 내용의 칙령은 그리스도교를 사실상 공인한다는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이때부터 교회는 착실하고 견실한 성장을 계속하였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수도를 비잔틴으로 옮겼지만 교회의 발전에는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 후 테오도시우스(Theodosius)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5현제시대 이후 계속되어 온 재정의 적자와 전쟁으로 인한 정국의 불안은 제국의 분열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었다.

   395년 동로마의 아르카디우스(Arcadius)와 서로마의 호노리우스(Honorius) 사이의 분열은 원칙상 행정적인 것이었으나 정치적, 지리적, 문화적 이질성이 분열을 고착시켰다. 그 후 100여년간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아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 시대인 476년 멸망하게 된다. 동로마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1,000여년 계속되다가 터키인의 침략으로 멸망한 1453년까지 계속되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