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일생에 몇 번은 중요한 만남을 갖게 됩니다. 자신의 선택과 관계없이 주어지는 부모와 자식 간의 만남이 있고 선택에 의한 만남도 있습니다. 만남에는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상대방이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만남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라고 하면서 우리를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정채봉 시인은 ‘만남’이란 시에서 여러 종류의 만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생선과 같은 만남입니다./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나오니까요./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꽃송이 같은 만남입니다./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요./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지우개 같은 만남입니다./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요./가장 아름다운 만남은/손수건 같은 만남입니다./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 주니까요.”
이렇듯 우리 인생은 갖가지 만남을 경험하면서 그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어떤 친구·스승·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또 읽은 책·직업·종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지기에 만남은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나의 만남은 과연 어떤 만남인지 물어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는”(1,14)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으로 당신의 일을 도와줄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십니다.”(1,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는 것이 우연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당신의 목적이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하기 때문입니다.(루카 13,33) 그들은 가난한 어부들이었지만 물고기를 잡기 위해 열심히 그물을 던졌습니다. 부모와 가족을 위해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 하시며 부르심의 목적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1,18)갑니다. 그들이 단번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이유는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첫째는 어떤 ‘슬픔’이 있었을 것이고, 둘째는 어떤 ‘경탄’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슬픔’이란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는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어떤 깊은 불만족이나 갈망, 한마디로 ‘사람이 빵만으로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자각을 뜻합니다. 그래서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 눈망울 크고 맑은 저 사슴처럼 하늘, 곧 영원을 향해 얼굴을 돌릴 수밖에 없는 마음의 상태를 뜻합니다. ‘경탄’이란 예수님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인격의 힘이랄까, 정말 세상을 ‘다르게’ 사는 스승의 온 몸에서 마치 자석과도 같이 어쩔 수 없이 뿜어져 나오는 어떤 인력(引力)을 뜻합니다. 이 두 가지가 있었기에 어부들은 예수님과의 첫 만남에서 단번에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 뒤를 따를 수 있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가시다가 호수에서 돌아와 쉬지도 못하고 찢어진 그물을 손질하여 내일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십니다.”(1,19) 주님께서는 마치 신랑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처녀들이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준비하고 있었듯이(마태 25,4) 오늘 일을 마치고 내일 일을 준비하는 그들을 귀하게 보십니다.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마태 25,21)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부지런히 자기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도구로 쓰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 나섭니다.”(마르 1,20)
분명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기 위해 이러이러한 것들을 버리고 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부르심 받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갈 뿐입니다. 부르심 받은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았기에 더 이상 지체할 필요 없이 삶의 터전과 생존을 위한 필수품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아마도 이런 체험을 두고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을 터입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데 불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움켜쥐고 있는지요? 많은 핑계를 대면서 그것을 내 손에 움켜쥐고 버리지 못하고 있는지요? 무엇이 진정 주님을 따르는 데 필요한 것이고 어떤 것들이 필요 없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포기한다는 것은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려놓는 것은 잃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입니다. 내 것을 내려놓으면 하느님의 것을 얻게 됩니다. 내 것을 포기하면 그때 하느님의 것을 주십니다.
우리는 매일 많은 것을 얻으려고 수고합니다. 그러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얻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고 버리는 일입니다.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삶이 쉬워집니다. 내 것을 내려놓는 순간 성령께서 나 대신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를 만나기 위해 일상 안으로 찾아오시어 “나를 따라오너라.” 하며 초대하십니다.
정애경 수녀(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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