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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체성사는 치유의 껴안음이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08 조회수494 추천수4 반대(0) 신고
사람마다 외로운 정도가 다르며 많은 사람을 사귀지만 친밀한 정도도 다르며
이웃과 더 가까워졌으면 하는 희망을 갖고 살고 있다.
내가 사제서품을 받고 난 직후의 젊은 사제일 때에는 청춘의 외로움밖에 느끼지 못했지만
성체성사시의 어떤 말씀들은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나는 젊었을뿐만 아니라 외로웠고 한 몸과 한 영혼으로 이끄는 말씀에 따라
스스로 외로움을 달래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개인적인 외로움과 끊임없는 갈망과 독신이라는 생각을 잊게 해주는
주님의 껴안음을 연상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다는 것은 나의 외로움을 잠재운다는 것을 것을 뜻하였다.
 
이는 논리적으로 전혀 모순이 없다. 성체성사가 외로움을 깨끗하게 씼어주는 껴안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늙어감에 따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더욱더 외로움을 타는 수가 많다.
이렇게 외로움의 골이 깊이 파이게 됨에 따라 자신이 얼마나 이 세상과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에서 멀어져 외톨이가 되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자신이 겪고 있는 어떤 고통보다도 외로움을 더 크게 느끼게 된다.
철저하게 이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것 같이 느낀다.
주위를 돌아보고 세계 뉴스를 보고 국내 뉴스를 보고 다니는 직장을 생각하고 개인적인 수많은 유대관계와 교회를 생각해도, 온통 긴장밖에 없는 것 같고 외톨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한 몸과 한 마음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누구나 직장과 역사, 환경, 배경, 성격, 이념, 지리, 신념, 피부색, 성(性) 면에서 외톨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깊은 곳에 숨어있던 상처, 질투, 이기심, 죄들이 고개를 치켜든다.
외로움을 타는 사춘기 같이 세상에는 마음을 서로 위로하며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사람은 없고
혼자밖에 없는 것 같이 느끼며 살고 있다.
 
 나는 늙어갈수록 사람들의 이러한 단절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는 데 대하여 무척 우려하고 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다보면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낙천적인 생각과 선의지(good-will)가 필요하이며, 사랑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밖에 없다는 것을 터득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지만 결코 헐리우드 영화에서처럼
실제로는 아무 이해관계가 없고 아무 공통점이 없는 두 사람이 깊은 상처를 가진 채로,
성숙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생각을 가진 채로, 같은 가치관을 갖고 있지 않은 채로 서로 사랑하지는 못한다. 참사랑만이 이런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뜨거운 포옹을 할 수 있게 한다.
어떤 점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순수한 사랑을 하며 처음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 않으면
이타적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차이는 개인적인 인간관계, 각자 다른 국가와 문화, 윤리관, 종교 때문에 생긴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와 같은 이질감을 완치될 수 없는 암과 같이 극복할 수 없는 절망적인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차이를 느끼는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마약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에서 빠졌던 사람은 누구나
무력함을 인정하면서부터 정상을 되찾았다고 실토하고 있다.
자기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서야
정상을 되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복음에서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서야
말씀을 따랐던 것을 볼 수 있다. “말씀은 진리였지만 우리들이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마음을 열고 도움을 청한 것을 아시고 기꺼이 도움을 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들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이 무력함을 인정하고 절망하고 있는 것을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께 간청하는 기도를 드릴 때에 비로소 주님께서는 일치와 다른 사람과 아무 꺼리낌이 없는 관계를 갖고 싶다는 진심을 들어주시는 것이다.
퀘이커 교도들의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모이면 가장 먼저 침묵을 지키면서
자신들이 할 수 없었던 화합과 일치를 주님께 간청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침묵은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이며 우리들이 끊임없이 일치를 이루게 하는 말씀과 행동을 찾아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을 포기한 결과이기도 하다.
 
성체성사는 우리들이 이루지 못했던 일치를 이루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우리들의 무능함을 실토하는 기도와 같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가장 외로우실 때 우리에게 일치를 당부하셨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당신께서는 말로써는 안 되며 더 이상 말씀하실 것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다.
당신이 가장 무력함을 느끼실 때 우리들에게 성체성사라는 무력함을 인정하는 기도를 해주셨다.
우리는 우리들의 조상이 했던 것처럼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뿐더러
메시아의 필요성을 직관적으로 느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치유하지 못한다.
그리고 상처와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결코 알지 못한다.
따라서 퀘이커 교도처럼 무력함을 하느님 앞에 침묵으로 표현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이룰 수 없었던 참된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는 성체성사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이러한 목적으로 성체성사를 봉헌하도록 해야 한다.
(롤하이저 신부님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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