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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 5 주일-너의 고통을 나의 몸으로
작성자한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08 조회수648 추천수8 반대(0) 신고
 
 
오늘 욥기의 말씀은 구구절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좀 윤색하여 말하자면,
“인생은 고해요
오래 살고 싶은 사람에게는 풀잎 끝에 이슬과 같고
빨리 고통을 끝내고 싶은 사람에게는 너무도 긴 인생살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도 없고
이래저래 행복하지 않은 인생 어찌해야 하오리까?!”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불행을 절절이 씹으며
하느님께 고통에 대해 따지고 있는 욥에게
동무라는 사람들이 찾아와 하느님에 대해 변호랍시고 하는가 하면
하느님께서 네 잘못 때문에 주시는 것인데 달게 받지 않는다고
욥을 도리어 꾸짖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네게 필요해 주는 고통이니
잘 받아들이라고 훈계하기도 합니다.

저도 이 동무들 같았습니다.
인생을 별로 살지 않았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겁 없이 말하곤 했습니다.
고통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라고.
고통은 우리를 더 성장케 하는 것이라고.
고통은 우리를 주제 파악하게 하는 것이라고.
고통은 우리에게 부활과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는 영광스러운 기회라고.
그중에서도 압권은 고통 중에서도 행복해야 참 행복이라고.

어느 것 하나 틀린 말 아닙니다.
그러나 나이를 조금씩 더 먹어가면서
이제 저는 저의 시건방졌던 지난날을 부끄러워합니다.
내가 한 순간도 통증이 없는 날이 없는 처지가 되면
그렇게 남에게 얘기하듯 자신에게 할 수 있을까?
남의 얘기라고 그렇게 쉽게 얘지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정신은 말짱한데 중풍으로 소대변까지 남에게 의존하는 처지가 되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는 영광스런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이런 고통 중에서도 행복해야 한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남의 고통에 대해 그야말로 남의 얘기하듯 대함,
그것이 저였습니다.

영어에 Vicarious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리하는’, ‘대신하는’의 뜻이 있는데
‘그의 몸이 되어 느끼는’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성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묵상을 할 때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그 고통을 같이 느끼는 성인들이 있었고
아니 우리 사람 중에서도 어떤 특별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치료할 때 그의 고통을 자기 몸으로 같이 느낍니다.
진정 사랑을 하게 되면 이렇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구의 고통이 그의 고통으로 객관적으로 있지 않고
나의 고통으로 옮아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는 게 너무도 고통스럽지요.
그래도 이 사랑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랑의 고통은 이분들에게 거부할 수가 없는 것이면서
그러나 놀랍게도 피학적 사랑의 희열을 줍니다.
저에게 영신지도를 받는 분 중에 이런 분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이런 분이십니다.
모든 병자들의 병과 고통을 당신의 것으로 느끼시고
십자가상에서는 Vicarious Sacrifice를 봉헌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고린토 전서에서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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