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 심 |
바오로해 특집 - 바오로 사도에게서 배운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루카가 쓴 사도행전에는 세 번에 걸쳐(9,1-43; 22,3-16; 26,4-18) 길게 나오지만, 바오로 자신의 서간에는 놀랄 만큼 짧게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갈라 1,15-16; 1코린 9,1. 15,8-9; 로마 8, 29-30) 될 수 있으면 언급을 피한다. 또 사도행전은 드라마틱한 외적 체험으로 묘사하고 있는 반면, 바오로 서간은 자신을 변화로 이끈 내적 체험에 더 주안점을 둔다. 그러니 밋밋한 사도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루카의 묘사가 더 흥미있는 것이 사실이다.
흔히 바오로 사도가 ‘말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성경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아마도 사도행전의 내용을 그린 미술작품에서 비롯된 착각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말에서 떨어졌다는 것만큼 사도의 회심을 잘 표현하고 있는 묘사가 또 있을까?
뼈대 있는 벤야민 지파 출신이었고 바리사이 중의 바리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시민권까지 가졌던 바오로. 세속적 권위로나 출신으로나 내면적인 자부심으로나 그는 마치 높은 말 위에서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는 상태와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빛이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의 종교적 신념과 자만심은 곧장 무너졌다. 모든 것을 환하게 볼 수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실은 소경이었음을 알게된 것이다.
루카는 그러한 바오로의 상태를 장님으로 형상화했고, 미술가들은 말 위에서의 형편없는 추락으로 절묘하게 묘사한다. 바오로의 회심은 다양한 표현으로 재생되지만 공통적인 것은 모두 사도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변화된 삶’이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문득 ‘주님이 정말 나를 불렀을까?’ 하는 의심이 들 때가 있다. 불쑥 ‘정말 이런 소명을 주셨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사도행전의 묘사처럼 번쩍이는 빛 속에서 주님을 보고, ‘아무개야!’ 하는 소리를 귀로 들을 수 있다면 하느님의 현존과 소명을 의심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외적 체험만이 하느님체험이라면 죽을 때까지 우리는 그분을 못 만날지도 모른다.
그것보다는 바오로 사도 자신의 기록처럼 내적인 체험에 관심을 돌려보자. 곧 성경말씀을 읽고 마음 안에 큰 울림이 있다면 그것이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주고받고 산다면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변화’로 부르시는 그분과의 만남,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회심은 결코 일회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호들갑스러운 일도 아니다. 회심은 매일의 삶 안에 깊이 받아들여지고 일생의 삶으로 재표현 되어야 할 어떤 이끌림이다.
그렇다. 그분의 이끌림에 순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각자가 올라타고 있는 말에서 기꺼이 내려올 줄 알아야 한다. 그분과의 진정한 만남을 위해서는 잘 보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있는 눈을 감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만남의 의미를 되새김질 할 침묵으로의 여행(갈라 1,17)이 자주자주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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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옥 체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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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수원 교구 주보 3면, 기획특집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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