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9.2.27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사58,1-9ㄴ 마태9,14-15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
가난이나 침묵, 단식 등 모든 수행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무조건, 아무 때나 가난이나 침묵, 단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를 분별해야 하고 애덕이 그 분별의 잣대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해서 제대로 못 먹는 사람은 단식은 무의미합니다.
이런 이들은 먹어야 하고
정작 단식할 이들은 잘 먹는 이들이요
건강을 위해서보다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단식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습니다.
침묵 역시 말 많은 자들에게 필요하지
고립단절 되어 외롭게 살아가는 독거노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말 많은 대화를 통해 풀어주는 것이 애덕입니다.
가난도 애당초 가난한 이들에겐 무의미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가난하고 싶어도 가난할 수 없습니다.
하여 가진 자들이 스스로 이웃과 나누는 자발적 가난이 의미가 있습니다.
겸손도 아래에 있는 이들이 아닌
높은 데 있는 이들이 아래로 내려오는 자발적 겸손이 의미가 있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이런 자기과시가 스며있는,
종교적 관례가 된 타성이 된 단식의 수행은 무가치합니다.
오히려 자기(ego)만 부풀려 교만하게 합니다.
단식을 하려면 주님 말씀대로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침통한 표정을 짓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하는 단식이 좋습니다.
아무 때나 단식하는 것이 아니라 단식의 때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때가 바로 단식의 때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여 주님과 일치를 위한 단식입니다.
단식을 통해 가난한 이들과 일치를 이루고 연민을 배울 때
비로소 참된 단식입니다.
진정한 단식은 자비행의 열매로 들어납니다.
이게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단식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는 것,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
굶주린 이와 양식을 나누는 것,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는 것,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게 하느님의 마음이요,
이런 자비행의 열매로 드러나야 진정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입니다.
이런 자비행의 단식을 실천할 때 우
리의 빛은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우리의 상처는 치유됩니다.
주님의 영광이 우리 뒤를 지켜주며
주님께 부르짖으면 주님은 ‘나 여기 있다.’ 대답하십니다.
이래서 분별의 잣대는 애덕입니다.
새삼 가난도 침묵도, 겸손도 단식도 사랑의 능력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참된 수행들은 자비행의 열매로 들어납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우리 모두 당신께서 좋아하는 단식을 실천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주님,
주님의 길을 제게 알려주시고,
주님의 행로를 제게 가르쳐 주소서.”(시편25,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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