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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월 1일 야곱의 우물- 마르 1,12-15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3-01 조회수380 추천수4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2-­15)
 
 
 
 
광야는 시험의 장소인 동시에 유혹의 장소입니다. 시험은 하느님한테서 오는 것으로 우리 영혼에 유익이 되지만 유혹은 사탄이 달콤하게 찾아와서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신명 8,2)라고 하셨듯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창세 22,1-­2 참조)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믿음과 순종을 단련하시기 위해 때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하느님의 시험은 우리의 충성과 불충, 믿음과 불신을 있는 그대로 알고자 하시는 것이지 악의 유인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를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기 위해 달콤하게 유혹합니다. 간교한 뱀은 하와를 찾아와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사실이냐고 물으면서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느님께 불평하도록 유혹을 합니다. (창세 3,1-­7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마태 26,41) 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히브 2,18)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마르 1,9 참조) 예수님 위에 방금 내려온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1,12 참조) 성령께서는 세례를 받자마자 예수님을 하느님과 함께 있도록 고독 속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제 더 이상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1)라는 하늘의 소리가 아니고 유혹의 소리를 듣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 사탄의 유혹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사탄의 유혹을 직접 경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육신적으로 가장 연약할 때가 예수님을 유혹하기에 가장 적합한 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때를 이용해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사탄은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확신을 받은 우리에게 찾아와 “네가 정말 하느님의 자녀라면 왜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가? 하느님께서 정말 그대를 사랑한다면 어찌 고통 중에 내버려 둘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유혹을 합니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죄와 타협하거나 양심을 거스르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우리도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던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사탄의 온갖 유혹을 이겨낼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헤로데 왕의 비행을 책망하다가 붙잡혔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희망의 빛이 꺼지고 절망과 좌절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5)고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준비하거나 이룰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실 때를 정하셨고 그를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손에 달린 문제가 아니며 오직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복음을 믿느냐 회개하지 않고 복음과 상관없이 사느냐는 우리가 결정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때맞춰 선포하셨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 책임입니다.

왜 예수님은 복음을 믿기 전에 먼저 ‘회개’하고 그 다음에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복음의 씨앗이 사람의 마음에 뿌려질 때 온갖 더럽고 추한 것으로 채워진 마음에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에 먼저 회개해 우리 마음 밭이 깨끗해져야만 말씀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기에 회개하지 않으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면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통상 회개는 지나간 일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생명을 유지하고 완성하실 하느님을 향해 영혼의 관심을 돌이키는 것이고 자기성취·자기만족· 자기업적에서 벗어나 생명의 신비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기성취·자기만족·자기업적을 추구하려는 이기적 경향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향해 우리 영혼의 진행 방향을 근본적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회개는 우리 관심의 중심이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되도록 하는 신앙의 태도이며 결단입니다. 하느님께 온통 마음을 기울이고 사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느님은 무조건 믿는다고 해서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게 간단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 안에 무언가 가득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마음을 비우는 게 관건인데 그것은 하느님께 돌아와야 가능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 우리는 결코 자신을 비울 수 없습니다. 생명의 영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할 때만 우리 욕망이 제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액 주스를 맛본 사람은 원액 10퍼센트에 불과한 음료수를 마시지 않는 것처럼 좋은 것을 아는 사람은 시시한 것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 법입니다. 하느님의 절대적인 생명을 사는 사람만이 자신을 비울 수 있습니다.

인생에 여러 가지 복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큰 복의 하나는 바로 ‘만남의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동업자를 만나는 것은 가장 큰 복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복된 만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남이고 이것이 인생 최고의 행복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변화됩니다. 마치 어둠이 빛이 되듯이 완전히 새로워집니다. 그러나 생활에 변화가 없다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빈껍데기와 같기에 회개의 결과는 삶의 변화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복음을 믿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며 아무런 의심 없이 하느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정애경 수녀(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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