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언가 변명할 때 “내가 언제?”라는 말을 곧잘 쓴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싶을 때, 특히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 흔히 쓰는 말이다. 또한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선의로 했던 행위에도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상당히 다르다. 전자는 따지는 듯한 반응이고, 후자는 언제 내가 그런 일을 했느냐는 겸양의 태도에서 나온 반응이다.
최후의 심판은 결국 우리 가까이에 있는 가장 작은 이웃을 사랑했는가에 대한 심판이다. 그 사람은 길거리의 걸인이나 장애자를 뜻할 수 있지만 아내나 남편, 수도 공동체의 가장 연로한 이들, 자녀, 남 앞에 내세우기가 부끄러운 형제 또는 나와 믿음 생활을 달리하는 타종교인일 수 있다.
그 사랑은 바로 지금 여기, 현실과 역사 안에서 가장 가난한 이에 대한 애덕의 실천을 요구한다. 그러나 사랑의 실천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만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뜻한 눈빛, 격려하는 말 한마디, 함께 있어준 시간, 기억해 주고 기도해 주는 사랑의 마음도 훌륭한 애덕 실천이 될 것이다.
오늘도 최후 심판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은 계속된다.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보이는 반응에도 차이가 있다. “제가 언제?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요?” 하는 것처럼 말이다. 주위에 가장 가난한 이들을 주님으로 알아보고 기꺼이 맞아들이면서 “제가 언제 당신께 해드렸습니까?” 하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하늘나라를 사는 행복한 사람이다.
배미애 수녀(착한목자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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