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고통의 생명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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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현아 | 작성일2009-03-08 | 조회수839 | 추천수13 | 반대(0) 신고 |
사순 2주일 - 고통의 생명성 신학생 때 여름 방학은 이태리 한 본당에 가서 있으면서 여름 산간학교에 따라 갔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험한 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였습니다. 개울도 건너고 경사진 곳도 오르락내리락 하였습니다. 특별히 한 작은 아이가 있었는데 비탈을 무서워서 못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하는 일도 없고 해서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그 아이를 번쩍 집어서 내려놓았습니다. 그랬더니 함께 갔던 주일학교 교사들이 저를 안 좋은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순간 실수했다는 것을 눈치 챘습니다. 선생님들이 그 아이를 도와주고 싶지 않아서 안 도와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가 홀로 해 낼 수 있는 기회를 제가 빼앗은 것입니다. 저처럼 안쓰러워서 도와준다면 아이는 점점 스스로 아무 것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면 스스로 해 낼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도와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의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매우 힘들어 보입니다. 겉에서 보기엔 아주 얇은 막이지만 그 안에 있는 병아리가 나오기 위해서는 발악을 해야 합니다. 알을 깨고 새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 안에 있는 병아리만이 알 것입니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엄마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이가 훨씬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엄마보다는 말 못하는 아기가 더 고통스럽게 태어나는 것이고 엄마는 그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아기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제왕절개를 해서 더 건강한 아기가 태어나면 모르겠지만 사실은 정상적으로 고통을 느끼며 태어난 아기가 더 건강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당연할 것입니다. 따라서 아기를 위해서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태어날 때부터 그 알을 깨고 새로 태어나는 고통을 겪게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누에고치라면 나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태어남의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남의 고통은 누구도 대신 겪어줄 수 없고 이것을 예수님은 ‘세례’라고 표현하십니다. 죽음과 새로 태어나기 위한 고통을 겪어야 그런 영광스런 모습으로 부활할 수 있다는 진리를 오늘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초등학생 때 학교에 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누에고치에서 나비가 나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느리고 힘들어보여서 저는 나비만 빼서 손에 올려놓았습니다. 나비는 마치 누에모양으로 쭈글쭈글해져 있었고 날개도 누에모양으로 오그라져있어 좀체 펴지지가 않았습니다. 저는 나비의 노고를 줄여주기 위해 살짝 입김을 불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희한하게 날개가 빨리 펴지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것에 재미가 들려 바람을 불어주었습니다. 물론 마음 안에는 이렇게 하면 나비에게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짐작하고는 있었으나 실험삼아 계속 해 보았습니다. 나비는 드디어 조그만 공간 안에 움츠리고 있던 날개를 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날지를 못했습니다. 날개에 아무런 힘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제 기억으론 결국 그 나비는 날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고 스스로 날개를 펴지 못한 나비는 날 수 없는 것처럼 인간도 새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누구도 겪어줄 수 없는 고통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왜 구약의 많은 위대한 성조들 가운데 오직 이 둘만이 예수님께 나타났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과 새로 태어남이 이 둘의 모습과 너무 닮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들과 예수님은 겉은 영광스러운 모습이지만 사실 ‘출애굽’, 즉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 시나이산 부근에서 40년을 숨어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타는 덤불로 나타나신 하느님을 만나고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사명을 받습니다. 모세는 기가 막혀합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인데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에서 건져 내겠습니까?"... 모세가 야훼께 "주여, 죄송합니다. 저는 도무지 말재간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했고 당신께서 종에게 말씀하신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워낙 입이 둔하고 혀가 굳은 사람입니다." 하고... 모세가 다시 "주여, 죄송합니다. 보내실 만한 사람이 따로 있을 줄 압니다. 그런 사람을 보내십시오." 하고 사양하자, 야훼께서 모세에게 크게 화를 내시며...” 모세는 좀처럼 백성들을 구해낼 자신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능력을 주시겠다고 하시는데도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당해야하는 수난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모세가 처음에 거부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하시며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죽음의 골자기로 내려가십니다. 모세가 이집트 땅에 내려가 거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온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어 지옥에 내려가 당신 백성들을 데리고 올라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훨씬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엘리야 역시 처음엔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으로부터 구해내기를 꺼려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목숨을 거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은 엘리야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바알신을 섬기는 사람들이었고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은 다 잡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엘리야만을 남겨놓으십니다. 이스라엘엔 심한 가뭄이 들게 하고 엘리야는 시돈지방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 집에 들어가 머물게 하십니다. 3년 반이 지나고 아합과 450명의 바알 예언자들 간의 운명의 결전이 갈멜산에서 벌어졌습니다. 송아지를 잡아놓고 그 위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는 편이 참 하느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엘리야가 이겼고 그는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조리 칼로 쳐 죽였습니다. 우상이 사라지자 이스라엘에는 비로소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불과 비는 성령님을 나타내고 엘리야는 성모님을 나타내고 희생제물은 바로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어쨌든 자신들이 믿는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말에 이세벨은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엘리야는 우상숭배를 없애 은총이 땅에 내려오게 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도망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한참을 도망 다니다가 너무 힘들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는 죽여 달라고 기도하였다. "오,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선조들보다 나을 것 없는 못난 놈입니다." 그러고 나서 엘리야는 싸리나무 덤불 아래 그대로 누워 잠들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우상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것과 같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셋의 사명이 서로 공통되고 그 공통된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고통 없이는 무엇도 새로 태어날 수 없음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을 깨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살리는 고통입니다. 이 고통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기에 자신이 받아야합니다. 고통의 생산성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통 없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없는 것처럼 고통 없이 자신은 물론 어떤 누구에게도 생명을 선사할 수 없습니다. 오늘 타볼산의 영광은 그래서 수난과 죽음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순을 지내고 있는 지금 우리, 우리가 겪어야하는 고통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오는 모든 고통은 새로 태어나기 위한 알을 깨는 고통들입니다. 이것을 이겨낼 때엔 타볼산의 예수님처럼 더 영광스러운 나로 새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을 지향하는 성인들은 항상 ‘저에게 멸시와 고통을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우리도 ‘고통 안에 숨어있는 생명성’을 묵상하며 사순 2주간을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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