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마르 9,2-10)
기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최고 가치로 여기는 것이 인재라고 합니다. 살벌한 글로벌 경쟁 체제에서 순간순간 피 말리는 전쟁을 벌이는 초일류 기업에겐 ‘인재 경영’이 생존의 화두라는 것이지요. 경쟁사에 인재를 빼앗기는 것은 곧 회사의 추락을 뜻하고, 반대로 인재를 많이 확보하는 것은 든든한 날개를 다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인재들과 하는 사업은 반드시 성공하고 핵심 인재가 기업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사람이야말로 기업의 진정한 경쟁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 초일류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휴렛팩커드·제너럴 일렉트릭·도요타 자동차도 핵심 인재 양성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목적은 다르지만 ‘인재 양성’을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인류 구속 사업을 성취하기 위해 열두 명의 제자를 뽑으셨습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이 배신하는 쓰라림도 겪으셨지만 목숨을 걸고 끝까지 운명을 함께한 다른 제자들, 특히 세 명의 애제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의 미래가 그들에게 달려 있었기에 그들을 ‘핵심 인재’로 양육하셨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일을 할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은 꼭 데리고 가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마르 5,37) 예수님께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하실 때(마르 9,2) 겟세마니 동산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기도하실 때도(마르 14,33 이하) 이들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들을 변화시켜 복음 증거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케 하기 위해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당신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통해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제자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방법은 죽음 후에 죽음의 고통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삶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경험하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이 조금 부족해도 죽음을 무릅쓰고 임명한 사람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마르 9,23) ‘엿새 후’라는 말은 이 이야기가 신화적 사건이나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역사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이요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지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제자들 앞에서 거룩한 몸으로 변화된 영광스러운 광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은 엘리야와 모세도 함께 나타나십니다(9,4).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이미 하느님의 영광을 경험한 분(탈출 24,16-17)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이미 하느님의 영광을 호렙 산에서 경험한 사람입니다(1열왕 19,9-18).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실제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확신하지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실제로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위엄과 권능으로 로마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는 왕으로서 예수님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마르 8,31 참조)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아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확실하지 않았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큼은 확고했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에게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믿음에는 아직 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영광스런 변모 사건을 보여주시면서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9,9)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서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9,10)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인재로 만들기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세 사람은 이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지만(5,35-43) 예수님께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되는 것은 아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귀중한 인재로 훗날을 위한 소중한 주춧돌로 쓰시길 원하셨기에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9,7)는 성부의 말씀도 이 맥락에서 울려 퍼집니다. 세례 때도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1)라는 비슷한 말씀이 하늘을 뚫고 울려 퍼졌지요. 회사에서 핵심 인재의 충성도는 무엇보다 사장과 확실한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장을 사장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때는 충성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에서 바로 하느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은 바로 “내가 인정하는 메시아다. 내 아들이다.”라는 사실을 그 신비한 경험 현장에서 분명하게 확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잠시나마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온 존재 역시 그분처럼 거룩히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지녀야겠습니다. 잠시 십자가의 고통을 받는 것은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라는 말씀대로 신앙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1코린 15,58) 우리의 삶은 예수님을 향한 생활이고 그의 구원의 사명을 함께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순간도 무의미하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분을 잊고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기적 욕망에서 비롯하는 삶의 자세를 포기하고, 부활에 대한 확신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느님의 방법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삶의 자세를 키워 나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