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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월 14일 야곱의 우물- 루카 15, 13.11-32 묵상/ 아버지의 마음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3-14 조회수461 추천수5 반대(0) 신고
아버지의 마음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루카 15,1­3.11-­32)
 
 
 
 
◆오늘 말씀의 바로 앞을 보면 잃었다 얻은 것의 기쁨을 표현하는 주옥같은 비유가 많이 있습니다.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되찾은 이야기, 은전 하나를 어둠 속에서 발견한 여인의 이야기 등이 그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100과 10이라는 숫자입니다. 이것은 모두를 뜻하면서 전체를 지칭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에서는 가족 구성원 전체를 의미할 수 있지요. 하느님은 모두의 구원을 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양 한 마리, 동전 한 닢이 없다면 그리고 아들 하나가 더불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구원의 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종교는 나와 남을 가르고 신자와 불신자, 구원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누고 가르는 일에 익숙합니다. 지난 연 말 성탄을 전후해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침략하여 몇백 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도 있었습니다. 본래 종교란 자기 아(我)를 죽이는 일에 철저해야 하는 법이지요. 자기 ‘我’는 손에 칼을 든 형상으로 남을 찌르고 상처 내며 고통을 자아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종교는 이율배반적으로 자기 ‘我’를 강화시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개신교와 가톨릭의 갈등이 여전한 것도 이런 실상이 반영된 것이겠지요.

이 점에서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기쁨을 노래한 성경말씀은 종교의 핵심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몫을 챙겨나간 너무도 영특한 아들이었습니다. 세파에 휘둘려 자신의 몸 하나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지치고 타락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비로소 아버지 품이 생각났지요. 얼마나 참혹했으면 아들로서가 아니라 종으로서 아버지 곁에 있고 싶었겠습니까?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늘상 기억했고 잘잘못을 묻지 않았으며 곁에 둔 아들보다 더 큰 사랑을 주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집안의 아들’이 오히려 우리가 관심을 둬야 할 본문의 주인공입니다.
 
여기서 집안의 아들은 ‘유다인’을 뜻할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못마땅했겠지요. 그러나 하느님 집인 교회에 머물고 있는 우리 역시 어느덧 그 시절 유다인처럼 변해 버렸습니다. 아버지 마음을 읽고 이해하기 보다는 강화된 자신의 ‘我’로 경계 밖의 사람들을 배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 안의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잃었다 찾은 한 마리 양이 주는 기쁨이 크다고. 하지만 아흔 홉 마리 양, 집안 아들의 소중함이 덜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모두의 구원, 전체를 품어 안으시려는 것이 아버지 마음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때론 우리가 아버지 마음을 방해하는 존재가 되곤 합니다. 형의 질시와 시기가 오늘 교회 안에 있는 나의 모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정배 목사(감리교 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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