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9.3.14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미카7,14-15.18-20 루카15,1-3.11ㄴ-32
"자비하신 아버지"
오늘 복음은 늘 읽어도 새롭고 감동적입니다.
이보다 깊고 아름다운 이야기도 없을 것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보다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비유’라 함이 적절하겠습니다.
오늘 새벽 독서의 기도 시
우리는 시편 136장은 매절마다
후반부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를 반복했습니다.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이
오늘 복음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통해 환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1독서의 미카 예언자가 말한
‘허물을 용서해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분’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을 모르는 체해 주시는 분’의
모습이 복음의 자비하신 아버지를 통해 환히 계시되고 있습니다.
아침 탈출기 독서 시 서두 말씀도 생각납니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어
자유로운 몸이 되게 하신 하느님은
우리를 세례를 통해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어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하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고 있는 지요?
오늘 복음의 두 아들은 ‘아들답게’의 삶에 실패했습니다.
늘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큰 아들의 고백을 통해
그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아버지의 종’으로 살았음을 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아버지의 종으로 살았기에
아버지의 자비를 몰랐고, 하여 돌아 온 동생에게 그토록 냉혹했습니다.
작은 아들 역시 아버지를 떠나 세상의 종이 되어 비참하게 살다가
마침내 아버지의 자비를 발견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비로소 자비하신 아버지를 깨달아
비로소 아버지의 아들로 새롭게 난 작은 아들입니다.
역설적으로 늘 아버지 가까이 있었던 큰 아들은
자비하신 아버지를 몰랐고
아버지를 멀리 떠나있었던 작은 아들이 자비하신 아버지를 깨달았습니다.
작은 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상징학고,
큰 아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의 집에서 늘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우리 수도자들
자칫하면 무자비하고 편협한 큰 아들들 되기가 쉽겠다는 생각이듭니다.
과연 우리는 어느 쪽인지요?
아버지의 아들로, 아버지의 자녀로 살고 있는지요?
아버지의 자비를 깊이 깨달아 갈수록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 아버지의 자녀로 살 수 있습니다.
역시 평생과제입니다.
복음의 큰 아들, 소위 잘 산다고 자부하는 이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여 정도의 차이일 뿐 우리 모두 큰 아들들입니다.
큰 아들은 물론 편협한 우리 모두를 일깨우는 주님의 다음 말씀입니다.
“예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큰 아들, 작은 아들, 모두에게
한결같이 자비하신 아버지이심이 드러납니다.
아마 이 말씀 듣고 큰 아들도 마음을 돌려 회개했으리라 봅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당신 자비의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시고
우리 모두 자비하신 아버지의 자녀들 되어 미사를 봉헌하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도다.”(시편103,8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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