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제2 제3의 니코데모 - 윤경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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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경재 | 작성일2009-03-23 | 조회수561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제2 제3의 니코데모 - 윤경재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요한 3,14-21)
니코데모는 바리사이파로 최고 의회 의원이었고 율법학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만하지 않고 참 지혜를 갈구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여러 표징을 행하시고 지혜 넘치는 말씀을 하자 보통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라고 짐작했습니다. 한번쯤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이목도 있고 자기 체면도 차릴 겸 밤중에 혼자 예수님께 찾아와 한 수 배우기를 청했습니다. 보통의 인간이 보이는 이중적 태도를 상징합니다. 심증은 가지만 확신이 안 서 머뭇거리는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였습니다. 예수님께 현대인이 흔히 보이는 태도입니다. 여러 가지 정보로 소문으로 예수님의 특별함을 알았지만, 현재 자기가 획득한 위치를 흔들리기 싫어 망설이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지혜로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러고는 민수기 21,5-9절에 나오는 구리 뱀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광야의 생활에 지겨워진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자 하느님께서는 불 뱀을 보내시어 물어죽게 하셨습니다. 백성이 놀라 모세께 나와 뱀을 없애주기를 주님께 기도해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구리로 만든 불 뱀을 기둥에 매달아 그것을 바라본 자는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은 구리 뱀에 어떤 주술적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을 믿고 따르는지 아닌지를 분별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인간의 죽음과 생명이 하느님께 달렸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고자 함이었습니다. 여기서 뱀은 인생에서 인간을 괴롭히는 모든 질곡의 상징입니다. 슬픔과 고통, 질병과 죽음, 불행과 무의미, 허무와 부조리 등등 인간이 겪어야할 존재론적 한계를 뜻합니다. 그 전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탓을 돌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할 일이란 하느님 명령대로 그렇게 바라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생명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내 몫이 아니라 그분 몫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죽음과 같은 부조리, 허무함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죄를 지어서인지 따져 묻기보다, 결과론적으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죽음보다 치유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치유의 방법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인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느님의 명령에 따르는 길뿐입니다. 하느님께서 하라고 하셨으니 하는 것입니다. 뱀을 쳐다보는 자는 살 것이라고 했으면 그대로 쳐다보면 된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말 못하는 구리 뱀이 아니라 예수께서 직접 말씀과 행동으로 그 사실을 밝히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굳이 아드님을 이 땅에 내려 보내실 책임이 없지만, 그렇지 않고는 못 배길 당신의 본질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한번 생명을 주셨으니 끝까지 살리실 작정이시라는 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일이 모두 다르고 고통으로 느껴지지만, 결국에는 생명으로, 선으로, 빛으로 귀결되니 걱정하지 말고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고 고통 속에 머물러 있으면 스스로 소외당하여 영원히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며, 믿는 자는 미래에는 물론 현세에서도 진리의 삶을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가르침에 니코데모가 어떻게 반응하고 처신했는지 요한 저자는 7,51절과 19,39절에서 예수님을 위해 일하는 모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말합니다. 그의 행동은 보기에 따라 익명의 그리스도인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진정 어떤 처신을 원하셨는지 그 판단은 우리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었습니다. 혹시나 우리가 제2 제3의 니코데모가 되지 말라는 뜻은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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