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괴 성모님 순례지 김웅열 신부님
겨울설경 -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찬미예수님
한 달이 참 빠르게 지나갔죠?
올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데 벌써 3월이 다가 옵니다.
1독서를 보면 야고버사도께서
누구든지 시련을 당할 때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라!
여러분, 시련을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없군요!
고통 자체는 악입니다.
그런데 왜 고통을 신비스럽다고 할까요?
오죽하면 묵주기도 중에 고통의 신비가 있잖아요.
고통은 네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사람으로부터 받는 고통
2) 절망으로부터 받는 고통
3) 물질로 받는 고통
4) 병 때문에 받는 고통
대부분의 고통이 이 네 가지 범주 안에 들어가지만, 어떤 이는 2~3가지가 중복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한 가지만 가지고도 오랜 세월 힘들어하지요.
그런데 이 고통을 신비스럽다고 합니다.
여러분, 햇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림자가 짙습니까? 옅습니까?
내가 지금 짙은 고통 가운데 있다면, 하느님의 조명의 강도(은총)가 크다는 뜻일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녀가 소화데레사입니다.
소화데레사는 현대의 성녀이며 사진도 남아 있지요.
신학생 때 짝사랑했던 성녀입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으며 16살의 나이에 교황님께 간청해서 갈멜에 들어가 수도하다가 23세에 폐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감곡성당의 첫 사제이신 임가밀로신부님께서 110년 전에 서품을 받고 한국으로 오기 전 소화데레사를 찾아갔습니다.
그 때 소화데레사는 가밀로신부님보다 16세나 어렸지만, 수도원의 그 어린 수녀님을 보고 가밀로신부님은 무릎을 꿇었으며, 그녀가 성녀가 될 것이라는 것을 그때 미리 알았습니다.
1930년 이 감곡성당을 지을 때 소화데레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1941년 소화데레사의 동상을 세우고 가밀로신부님은 그녀의 사진 앞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소화데레사와 가밀로신부님은 영적 오누이였습니다.
소화데레사는 병치레를 많이 하였습니다.
죽기 얼마 전에는 병중에 옷 입을 힘조차 없었지요.
지금은 수녀님들 옷이 간단하지만 그 옛날에는 속에 입는 옷도 많았고 더구나 갈멜수녀원이니 더 많았을 겁니다.
동료수녀가 소임을 나가기 전에 옷을 입혀 주고 나가곤 했는데 머리에 쓰는 것은 핀으로 꽂아야 하는데 어느 날 핀이 살을 뚫은 채 꽂아 놓고 그냥 나갔던 겁니다.
하루 종일 흘린 피가 저녁에는 시트 밑에까지 젖었지요.
옷을 입혀 주었던 수녀가 왜 종을 잡아당기지 않았느냐고 하자
첫째, 나에게 소원이 있는데 예수님 그 십자가의 고통을 천분의 일이라도 느끼고 싶었으며
둘째는 나를 위해 옷을 입혀 준 수녀님이 내가 소리를 지르면 얼마나 놀라겠느냐!
이것은 사람에 대한 배려지요.
빨랫터에 가면 유난히 성격이 남자 같은 수녀가 요란스럽게 방망이질을 하여 물을 다 튀기곤 했는데, 유독 소화데레사는 그 옆에 앉아 튀기는 물을 다 맞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 수녀 옆에 앉니?”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실 때 침 뱉음 받으신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끼고자 그랬다 고 했습니다.
소화데레사는 모든 것을 양보할 수는 있어도 고통만큼은 절대로 남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받아들일 만한 것 받아들이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기까지도 힘이 든데 과연 사랑까지 할 수 있을까요?
우리들이 잘 아는 프란치스코성인이 자라난 환경을 보면 부잣집 장삿꾼의 외동아들로 그야말로 개망나니처럼 살았습니다.
글라라성녀의 뒤를 따라다니며 ‘저것 좀 어떻게 꼬셔 보나~~’
그러나 글라라성녀가 너무 올곧게 살아서 가까이 하기 어려웠는데~~
어느 날 빵을 가지고 산으로 가는 글라라의 뒤를 쫓아 가보았더니 문둥이들이 사는 소굴로 가서 나병환자들을 먹여 살리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동안 나의 삶이 엉터리였구나!
우리가 회개하기로 결심하면 하느님께서 즉시 시험을 하시거나 때론 마귀의 장난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성인은 실제로 그런 일을 겪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누가 문을 두드려 나가보니 거적을 덮어 쓴 사람이 “너무 추워 견디기 힘드니 몸 좀 녹이고 가게 해 주시오!”
그를 들어오라고 해서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그 불빛에 얼굴을 비치어 보니, 얼굴에 고름이 줄줄 흐르고 구멍만 뻥 몇 개 나 있었다.
나병은 격리된 환자입니다.
나병은 육신만 썩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영혼이 더 썩어 있지요.
어제 복음에 나왔던 나환자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저 분이 나를 살릴 것이다!’
‘예수님, 하고자 하시면 저를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겸손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 시대 나병환자는 도시에 올 수 없었습니다.
예전의 프란치스코는 그를 두들겨 패서 내쫓았겠지만~~
이제 착하게 살기로 마음먹었기에 물도 갖다 주고 벽난로 곁에 쉬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층 침대에 가서 잠이 들었는데 누가 얼굴을 더듬어 보니 문둥이가 침대 속으로 들어 와 고름이 얼굴에 묻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여자문둥이는 아니었어요^^
안 되겠다! 그래서 문둥이를 꼭 끌어안고 잠이 들었습니다.
새벽에 눈을 떠보니 옆자리가 비어 있었고
방 안에는 장미향기가 가득했습니다.
‘이게 무슨 냄새일까!’
침대 위에는 문둥이 대신 성부, 성자, 성령을 나타내는 장미 세 송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 장미를 들고 엉엉 울면서
“주님이 다녀 가셨군요!!!
예수님, 제가 어저께 밤에 주님의 배를 걷어차지 않게 해 주셔서, 제가 주님을 창 밖으로 던지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가 완덕으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자매님, 그 인간 생각하면 3년 전에 먹은 미역국이 기어 올라오는 인간 없습니까?”
“없다구요???”
“나만 있나!!!”
“나는 아직도 있는 데, 신부가 창피해 죽겠네! 나만 있나보다!^^”
예수님께서 실크원피스를 입으시고 금발 올백 머리에 핑컬 퍼머를 하시고 쌍꺼풀 진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야! 내가 예수다!”
그러실까요???
아니지요, 내 속을 뒤집어 놓는 인간으로 나타나십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수백 명의 예수님이 다녀가셨습니다.
“왜 저 인간 안 잡아 가나!”
이렇게 손가락질 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가 목 말랐을 때
내가 감옥에 갔을 때~~
내가 병 들었을 때~~
그 사람이 나랑 비스므리한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이 곧 나다! 라고 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성인이 예수님을 끌어안은 것은
천국을 끌어안은 것이며
이 세상을 끌어안은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 시험에 통과가 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장하다!’ 라는 뜻으로 장미 세 송이를 두고 가신 겁니다.
어느 보좌신부님이 강론 때 이 말을 듣고
‘예수님, 저는 세 송이 말고 딱 한 송이라도 놓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너무나 간절히 기도하기에....
내가 그 신부님 잠들었을 때 머리맡에
장미 세 송이 놓고 나왔지요^^
다음 날 “신부님, 큰일 났어요! 예수님이 다녀가셨어요!"
그 신부님 본당 맡아 나가신 지금도 믿고 있어요.
우리가 간절히 애원할 때 기도하면서
'믿어야 하나!!!'
고통 가운데 하나가 인간이 주는 고통인데, 그 인간이 주는 고통이 참 힘이 들지요.
피정 지도 다니며 한 말 중에 신부인 제가 칼을 품고 3년을 다녔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성당 지을 때 나를 사기 친 사무장이 준 고통.....
그러나 그 시몬이 예수님이었습니다.
만약 그런 고통이 내게 없었다면~~
저는 병에 대한 고통을 넘으면 돈에 대한 고통이 오고~~
돈에 대한 고통을 넘으면 절망이라는 고통이 다가오곤 했습니다.
오늘 야고버사도께서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긴다고 합니다.
우리가 시련의 매를 맞아 보면 어지간한 매는 매 같지도 않지요!
가느댕댕한 나무는 뿌리채 뽑히지만
느티나무나 소나무는 뿌리가 깊어서 잘 안 뽑힙니다.
소나무의 그 연약하고 부드러운 뿌리가 바위를 뚫을 때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프란치스코성인을 성인으로 만든 것은 고통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마지막 축복인 빛의 축복마저 잃고 장님이 되었을 때 하느님을 지복직관하게 됩니다.
그 때 만들어진 노래가 ‘태양의 찬가’ 이지요.
거기에서 죽음을 누이라고, 고통을 벗이라고 했습니다.
성인께서는 알몸으로 대지에 누워 죽음을 맞이하며
“내 영혼을 당신께 바치나이다!”
마지막 축복인 빛의 축복을 봉헌하고 난 후에 받은 은총이었지요!
모든 성인과 성녀들이 가시덤불에서, 벼랑 끝에서,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똑같이 쥐약을 나누어 먹어도 죽는 시간이 조금씩 다를 겁니다.
이렇게 죽는 시간이 다르듯이 사람의 고통도 다 다르지요.
산을 넘으면 늪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하고 맨 발로 가시밭길을 가야할 때도 있으며 그곳을 지나면 깊은 강이 가로막습니다.
아오스딩성인은 '주님안에 쉬기까지 나는 늘 방황하나이다. 나의 신이시어!'
저는 하도 많이 고통을 겪으니까 편하게 살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내가 편히 쉬어야 한다면 그 곳은 하느님곁이며 사제로 살아 온 것을 보답해 주시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고통을 당하면 고독하고 외로워집니다.
자기 안으로 들어오게 되지요.
이것이 고통의 신비입니다.
부부도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지요.
사업이 부도나서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 마누라가 이 갈고 자면
‘아, 이 세상에 나 혼자 밖에 남지 않았구나!’
고통은 존재론적으로 홀로 가는 것입니다.
옆에서 도와주고 위로해 줄 수는 있겠지만
어차피 그 고통을 이겨내는 것은 홀로 입니다.
패션오브크라이스트에서 예수님께서 당하는 고통을 보면 고통을 당해도 그보다 더 어떻게 당하겠습니까!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왜 그 길을 가야만 했을까요!
우리는 꽃밭 속에 있을 때 하느님을 뵐 수가 없습니다.
저는 시련을 많이 겪은 사제입니다.
하느님께 넘치도록 과분하게 많은 재능도 받았지요
만일 순탄하게 이 길을 걸었다면~~
그 재능을 교만의 도구로 사용했을 겁니다.
바오로사도가 인간적으로 남에게 꿀릴 것이 없었지요.
그는 유대 정통가문 출신이며 가므리엘의 직계 제자이고, 로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잔뜩 교만해질까봐 가시하나를 박아 주셨는데 바오로는 이 가시가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의학자들은 조심스럽게 ‘바오로의 이 불치병은 간질병이 아니었을까!’
설교를 하다가 조금 피로하면 뒤로 넘어져 진흙위에 뒹굴고 나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도저히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이 가시를 빼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를 하고 난 후 받은 말씀이 고린도후서 12장 9절입니다.
“너는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느님의 권능은 강한 자, 힘 있는 자, 가진 자, 능력 있는 자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 안에서 그 권능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바오로사도는 치유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말씀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육신이 치유되었다고 해도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성서에서 하혈병을 앓던 여자가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난 나자로가
아직까지 살아 있지 않지요! 한시적으로 사는 겁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 얼짱, 몸짱이었다 해도 숨 끊어지고, 한여름에 송장 썩는 내가 진동하면 자식도 안 보고 싶어 합니다.
옛날에는 여름에 삼일장을 하면 조문객들도 코를 막고 돌아섭니다.
인간은 ‘숨’ 즉 성령이 떠나면 별 것 아니지요.
귀하고 비싼 존재일수록 썩으면 더 지독합니다.
사제인 제가 잘못 살았을 때 나는 냄새가 더 지독하지요.
성당 다니는 사람이 잘못 살았을 때 풍기는 냄새는 성당에 안 다니는 사람이 잘못 살았을 때 풍기는 냄새보다 더 지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인간에게서 나는 냄새를 주변사람은 다 맡는데 정작 본인만 못 맡는다는 겁니다.
야고버사도의 편지를 읽으면서
자기 자신에게 고통과 시련이 온다면, 지혜 있는 사람은 그 고통을 통하여 영적으로 업그레이드가 될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더 멀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고통이 오지요.
여러 가지 고통이 올 때 인간적으로 분노가 오고, 하느님과의 끈이 끊어집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느님과의 끈이 다시 이어지는데
죄가 있는 곳에 은총이 있다!
하느님과 끊어진 끈을 묶으면 매듭이 묶인 만큼 하느님과 가까워지겠죠?
고통의 십자가 없이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우리는 종교를 선택할 때 십자가 없는 예수님을 선택하고 싶어합니다.
여러분, 세례 받을 때 감언이설에 속았습니까?
세례만 받아 봐라! 죽을 때 까지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로또 복권에 빵빵 당첨될 것이며 복잡한 인간관계도 깨끗이 해결될 것이다. 그러지 않았지요!
예수님은 단 두 마디로 알려주셨습니다.
* 네 십자가 지고 따라라.
* 내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마귀를 끊어 버립니까?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까?
사도신경은 이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다락방 미사를 드릴 때 2000년 전의 성령이 임하시어
썩어 들어가는 영혼에 고통에 시달리는 영혼에 사랑의 힘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성령세미나에 오신 회장님의 강의내용 중에
대나무는 뿌리가 약하기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속을 비우며
줄기와 줄기사이에 마디를 주어 바람이 스쳐지나가도록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 믿음도 약해져 쓰러지지 않으려면
스스로 비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주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피정과 묵상, 기도를 통하여 마디를 주어야 합니다.
신앙이 강하다고 자부할 때
때론 해일이 몰아쳐 풍랑의 바다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날 회장님의 대나무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기에
그때부터 대나무를 유심히 보게 되었습니다.
대나무는 뿌리가 깊지 않고 약합니다.
대나무는 키가 크지요.
그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서 비우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마디를 두어 바람의 압력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들도 대나무 뿌리처럼 믿음이 깊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대나무처럼
끊임없이 비우고~~
끊임없이 멈추어 서서 마디를 둔다면~~
천국 가는 그 날까지
해일과 태풍 그 어떤 시련이 오더라도
능히 헤쳐 나갈 것을 믿습니다. 아멘.
2006. 02. 13(월) 다락방미사 가르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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