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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유롭게 하는 진리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4-01 조회수683 추천수6 반대(0) 신고
 
 

자유롭게 하는 진리 - 윤경재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요한 8,31-42)

 

 인간의 역사는 진리가 무엇인지 물으며 산 역사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왜 사는지, 왜 생명이 유한한지, 죽음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의문을 풀고자 여러 사람이 매달렸습니다. 많은 철학자, 사상가, 종교인이 나름대로 진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그간 많은 철학적 사고가 있었지만 인간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확실한 대답을 내어놓지는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초기 공동체가 싹트는 시기는 그리스 헬레니즘이 지배하는 시기였습니다. 헬레니즘의 문화적 특징은 지혜를 추구함입니다. 그 결과 영지주의가 영향을 미치는 때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인간이 신령한 지식을 알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어야 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진리에 대해 할 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에 진리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고 큰 주제가 되었습니다.

  어떤 지식이나 깨달음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영지주의는 결국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 구원받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구원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는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예수 그리스도마저 여러 아이온(중간 신령체) 중에 한 분이라는 그들의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반 영지주의적 가르침을 펴야했습니다.

  진리는 인간의 언어를 초월하는 그 무엇입니다. 진리는 실제로 들어나기도 하지만 단순히 인간의 어떤 개념에만 한계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어떤 주의(主義)로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어떤 언설로도 묘사할 수 없는 무한한 것입니다.

  요한이 말하고 싶은 진리란 ‘비밀 전수’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삶 전체입니다. 작게는 수난과 죽음과 부활 사건이며, 크게는 예수님의 강생으로부터 전 생애를 포함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시고 말씀하시고, 기적과 치유와 구마 등등 여러 가지 권능을 보여 주시어 진리란 이런 것이라고 몸으로 증거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전 역사에 걸쳐 그들을 구원하시려 했던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어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건이 바로 진리라는 것입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진리 그 자체이며 확신에 찬 자유로움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어떤 인간의 삶도 예수의 삶과 비교해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진리를 온전히 증언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요한저자는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습을 따르는 것을 제자 됨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을 머문다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머물러 있어야 열매를 맺듯 제자 됨은 예수님께 뿌리내리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제자로 머무는 것은 단순히 어떤 상태가 아닙니다. 매순간 벌어지는 행동이며 투신입니다. 그는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깨달음에 머물지 말고 투신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영지라는 명사형 말 대신에 ‘그것을 믿는다.’라는 동사로 표현하였습니다. 요한복음서에서는 믿음이라는 명사형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믿는다’라는 동사형을 썼습니다. 믿음이란 구체적 투신이 있어야 증명이 되는 것이지 단순히 아는 상태에 머물면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온전한 비움의 행동을 실천할 때 아빠 하느님께서 들어와 사시는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이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온전한 비움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영광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자유는 저절로 따라오며 어떤 제약에도 거리낄 것이 없게 됩니다. 생각에 머무는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투신하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을 수 있습니다. 아빠 하느님께서 아드님의 삶을 보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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