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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브라함 전부터 계신 분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4-02 조회수551 추천수8 반대(0) 신고
 
 

아브라함 전부터 계신 분 - 윤경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요한 8,58)

 

 요한복음서의 키워드가 ‘ego eimi’ 라고 묵상한 적이 있습니다. 이 때 eimi 동사는 영어 be 동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있다. ~이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일인칭 현재 능동형입니다. 어느 나라 글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그리스어 동사 어법에서 시제의 일치와 태의 일치가 중요합니다. 한 문장 안에서 시제가 일치하여야 함은 필수입니다. 그래야 말이 통하는 법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라 번역한 58절을 그리스어 원문으로 읽어보면 한 문장 안에 든 두 동사의 시제가 다르게 표현되었습니다.

“prin abraam genesthai ego eimi” 여기서 genesthai 동사는 태어났다는 과거형이고 eimi 동사는 현재형입니다. 이를 직역하면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이다.”가 됩니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형태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가 문법을 몰라서 이렇게 썼을 리가 없습니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담겼음이 틀림없습니다. 결론은 ‘ego eimi’ 가 관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ego eimi ”라고 이해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것은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ego eimi 존재로 현재까지 살아있다.”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도 1992년에 출판된 TEV판에서는 “Before Abraham was born, ‘I Am’”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시제의 불일치를 참작하여 ‘I Am’을 아예 따옴표 처리하고 대문자로 썼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만 이런 ‘ego eimi’ 용법이 12. 18. 24. 28. 58 절 등 다섯 차례나 쓰였습니다. 그것을 나열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바로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예수께서는 ‘ego eimi’ 를 아주 특별한 의미로 쓰셨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신원을 자각하시고 그 진리를 유대인들에게 이해시키려 부단히 노력하셨습니다. 이것들의 의미는 예수님께서는 세상 창조 때부터 아빠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처음부터 빛이셨고, ‘ego eimi’ 를 증언하며, 그 진리를 믿지 않으면 죄 속에서 죽을 것이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들어 올린 뒤에 그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한 유대인들은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라면서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극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은 민족의 시조이며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잘 살고 있던 하란 땅을 떠나 새로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라는 하느님 말씀만 믿고 길을 떠나 힘든 여정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이 한꺼번에 완성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근이 들어 이집트로 피신했을 때 자기 부인을 누이라고 둘러대고 파라오에게 혜택을 받았으며 그 결과 파라오가 하느님께 재앙을 받았습니다. 또 아들을 낳으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철석 같이 믿지 않았습니다. 부인의 몸종에게서 후손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집안이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재산도 늘어났고 하느님과 계약을 맺으며 신비 체험을 여러 번 했었지만 또 다시 나그네살이 할 때에 아비멜렉에게 부인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소개하여 혜택을 보려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역시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유대인들 머릿속에는 이런 아브라함의 행동이 남아 있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인간적인 판단으로 사는 것이 아니냐며 예수께서 나이가 쉰도 안 된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인데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고 말하니 판단력이 부족하다고 보았습니다. 적당히 둘러대면 좋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생각을 경우에 따라 선택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라고 아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자신을 생각하기보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우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어 당신 목숨까지 증여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 막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와 아브라함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보다 더 큰 간극이 예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인간보다 뛰어나신 분이며, 앞서신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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