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마르코12,1-44)/박민화님의 성경묵상
작성자장기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4-03 조회수603 추천수4 반대(0) 신고
 
2009년 4월 3일 금요일 마르코복음12장
 
마르코 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일반 백성들은 예수님을 '호산나 저희를 구원하소서' 라고 외치면서
메시아로 받아 들였으나,율법을 알고 있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려고 하였는데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 들이면 기도하는 성전이 되고 구원 받는
성도들이 되지만 예수님을 배척하면 장사하는 성전이 되며
심판 받게 되는 과정을 보여 주시고
 
12장에서는
예수님을 받아 들여 구원 받는 하느님의 자녀들과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 들이지 않아 심판 받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 대해서
예화를 들어 말씀하시며
오늘날 성경을 읽은 우리들도 말씀을 받아 말씀으로 살아 가는 성도들과
말씀을 배척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마태 복음에서는 5장 6장 7장에서 산상설교를 설명하시고
마태 복음 8장에서 21장까지 산상설교를 설명해 주시고
마태 복음 22장에서는
산상설교가 이루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에 속하는 장이고
마태 복음 23장은
산상설교가 이루어지지 않아 심판 대상에 있는 사람들이
마태 복음 23장에 속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진리 성령으로 우리들 안에 오시지만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깨닫지 못하여 영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을 메시아의 신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매일 매일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살아갈 때
우리 안에 말씀의 열매인 사랑이 오는데
하느님의 얼굴을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볼수가 있는데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볼 수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나 장점이 있으며 또한 단점도 있지만
가능하면 장점만 보고  서로 서로 사랑을 나눌 때 하느님의 얼굴을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마태 21,33-46 ; 루카 20,9-19)
 
이사야서 5,1-2
내 친구를 위하여 나는 노래하리라,
내 애인이 자기 포도밭을 두고 부른 노래를  
 
내 친구에게는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이 하나 있었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가운데 탑을 세우고 포도 확도 만들었네
그러고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네.
 
구약에 선포된 말씀을 예수님께서 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집주인은 하느님을 상징하며
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성도들의 마음을 상징하며
(마태복음13장 길밭,돌밭,가시밭,좋은땅)
농부들은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를 즉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를 상징하며
종은 예언자들을 상징하는데
 
메사아인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구약에서 예언자들을 죽이고
마지막에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되는 잘못을 범하는데
우리들도 죄를 지을때 마다 예수님께 마음으로 못을 박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서 깨달아
레마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 합시다.
 
포도원도 육안으로 볼 때는
땅으로 보지만 차원을 달리해서 보면
포도밭도 사람들의 마음을 상징하는데 하느님께서 말씀의 씨를 
우리들 마음 안에 심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기 위해서
포도 나무로 비유된 하느님 말씀을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심었는데 좋은 포도나무인 하느님 말씀을 심었는데 이스라엘 민족들이 좋은 열매인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들포도인 육의 열매인,
미움 시기 질투등의 열매를 맺기 때문에 꾸짖는 것입니다.
 
우리들 안에도 하느님 말씀과 관계를 맺어 살아 가면서
좋은 포도가 맺었는가? 들포도가 맺었는가? 묵상합시다. 
 
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설명:
어떤 사람이라고 할 때 헬라 원문에는 '안드로포스'인데
이 경우에 단수로 되어 있으며
이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상징하며
포도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신약의 새 백성들인
성도들의 마음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마태복음13장)
 
2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종 하나를 보내어,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설명:
소작인들인 농부들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말하며
포도밭 소출을 바치지 못하는 이유는
육적으로 볼 때는 포도 농사가 잘 안되서 바치지 못하는 것로
생각되지만 차원을 달리해서 보면
 
요한복음 15,3에
참 포도나무와 가지가 나오는데 하느님과 관계를 맺어
성령의 열매인 사랑,기쁨,평화,인내,친절,선행,진실,온유,
절제등의 삶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을수 없기 때문에 없어서 못 바치는 것입니다.
내안에 사랑의 열매가 없는데 존재하지 않는데
바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님과 하나되어 사랑의 열매가 없으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를 붙잡아 매질하고서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4
주인(하느님)이 그들에게 다시 다른 종을 보냈지만,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고 모욕하였다.
5
그리고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냈더니 그 종을 죽여 버렸다. 그 뒤에 또 많은 종을 보냈지만 더러는 매질하고 더러는 죽여 버렸다.
 
설명:
종은 예언자들을 상징하며 오늘날에는 하느님 말씀을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들이 예언자들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행위가 될수 있기 때문에
한번쯤은 잘 생각해야겠습니다.
 
6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설명:
아들은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영안이 열리지 않아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예수그리스도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하느님께
부활영광을 드리고
예수님께서도 부활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님과 하나가 될 때는 영혼 육신이 부활하여
부활 영광에 참여할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합시다.
 
7 그러나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8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9
그러니 포도밭 주인(하느님 상징)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설명:
하느님께서는 포도밭인 당신의 백성들을 다른 사람들인
그리스도 교회에 맡겼습니다.
 
10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예수그리스도 상징)이 되었네.
 
설명:
버린돌과 모통이의 머릿돌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며
구약의 옛 계약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새계약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시편118,22)
 
11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12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 그분을 그대로 두고 떠나갔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마태 22,15-22 ; 루카 20,20-26)
 
마태복음 22장에서는
혼인 잔치에 말씀의 예복을 입은 후에
하느님께 그리스도의 형상화가 된 우리를 바치고난 후에
부활하여 산자가 되기 때문에 사랑이 나오며
이 사랑이 첫째가는 계명이고
둘째 계명은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말씀하시고
이런 사람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라고 설명을 하셨는데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복에 대한 말씀은 없고 황제에게 바치는 주민세에 대한
예화가 나오는데 우리 안에 말씀으로 짜진 그리스도의 형상화가
되어야 구원 받는 자인데
그리스도의 형상화가 되어 있지 않고
돈으로 된 초상화가 되어 있으면 장사하는 성전이고
심판받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초상화가 되어야
그리스도인이 되며 구원 받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13
그 뒤에 그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14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16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설명:
말씀이 이루어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화가 되어 기도하는
성전이 되지만 말씀화가 되지 않는 사람들은 돈에 있는 초상화가
우리들 마음에 그려져 있는 사람들은 장사하는 성전이 되며
심판받게 되는데
반드시 말씀을 읽고 말씀화가 되어 우리들의 심령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화가 되어야 구원 받는 성도들이 되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우리들의 삶에서 말씀이 이루어져야 사랑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17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

부활 논쟁 (마태 22,23-33 ; 루카 20,27-40)
 
부활을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는데
죽기 전에 반드시 고난이 오는데 우리들은 죽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부활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에 심령이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죽는 것이고
내 마음을 완전히 버렸을 때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 오셔서 사랑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선악으로 보지 않고 선악으로 심판하지 않으며
화 자체가 없고 미움 자체가 없어지며
모든 것을 사랑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산자는 모든 것을 사랑하며 오래 참을수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이 오는데 부부싸움도 한쪽이
죽으면 싸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살아 있을 때는 계속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선과 악으로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이 죄이고
이 죄의 벌로 죽음이 오는 것입니다.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설명:
육적으로 볼 때는 수난 받고 죽고 부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영안으로 볼 때는 우리들의 심령이 죽고 부활하는 것인데
마음의 변화가 부활인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인 에고를 죽이는 것은 힘든 일인데
부부가 서로 싸울 때도 한사람만 죽으면 평화가 오고 기쁨이 오지만
서로 마음이 죽지 않기 때문에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들의 심령이 죽는데는
누군가가 고통과 박해를 했을 때 결과적으로 죽기 때문에
리들은 수난과 고통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설명: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사악의 하느님,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만난 하느님,이사악이 만난 하느님,야곱이 만난 하느님을
말하는데 우리들도 현재 여기서 하느님을 만나야 되는데
 
요한복음14,6에 "나는 길이요,진리요.생명이다"라고
하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진리의 말씀을 읽고 깨달아
삶에서 살아 가면서 말씀의 열매인,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고 느끼고 체험했을 때 내 안에 계신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가장 큰 계명 (마태 22,34-40 ; 루카 10,25-28)
 
말씀을 읽고 말씀화가 되어 그리스도 옷을 입은 사람이 그리스도
형상화가 되고 부활하여 산자가 됐을 때
아가페 사랑이 나오며 아가페 사랑이 충만할 때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부활 논쟁을 설명한 다음에 첫째 계명이 나오는 것은
수난 받고 죽고 부활하여 산자가 되면 첫째 계명이고
새 계명인 사랑이 나오는데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나를 박해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수 있게 되며
사랑이 충만할 때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과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과 예수님과 사도들이 있었는데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율법에 있는 십계명 중
제 6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한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보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이 간음하는 것은 빛이고
생명인 나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간음했지만 이제 나를 만나면
어둠으로부터 해방이 된다는 것을 예화에서 보여 주시는데
 
이 간음한 여인은 마음으로는
이미 돌에 맞아 죽는 아픔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즉 이 여인에서 간음때문에 고난 받고 마음이 죽고
예수님을 만나 육체적으로도 살아나고 영적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이 율법으로 판단하고
즉 선악으로 판단하고 말하고,행하는 일은 소경이고 죽음인 것입니다.
즉 죽은 자들의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의 일은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너희들은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선악으로 판단하지 않고
사랑으로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자세히 보면 다 장점이 많이 있고
또한 적은 단점도 있지만
사랑의 눈으로 볼 때는 장점과 단점을 다 수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장점을 보고는 우리도 본받아야 하고 단점을 보고는
내 안에 있는 단점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지 말고 사랑으로 수용할 때
사랑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킬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합시다.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이렇게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설명: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
하라는 말씀은 수난 받고,죽고,부활하여 살아 있으니까
산자가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극치에 도달하면 순종하는 것입니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예수그리스도)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면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고
나의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분이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수난 받고,죽고,부활한 사람은 사랑이 오는데
사랑이 충만하게 되면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느님이라고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런 분이 그리스도 각자 본명 즉
그리스도 베드로,그리스도 바오로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인성으로 볼 때는 예수님이 다윗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신성으로 볼 때는 그리스도는 자존자이기 때문에 다윗이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다윗이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 과거와 미래로 보지 말고
현재로 보고 묵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35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36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37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마태 23,1-36 ; 루카 20,45-47)
 
마태복음 23,1~12 즉 마태복음 23장에 속하며
세상의 심판장에 속하는데
내가 여기에 있으면 말씀 붙잡고 출애굽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겉꾸며 길게 기도하는 자들이라고
나오는데 과부들은 육안으로 볼 때는 
남편이 죽거나 없는 여자를 말하지만 
 
영적으로는 영적인 신랑인 예수님이 내 안에
없는 사람은 영적인 과부이고,하느님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영적인 고아이고 이방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과부들이 될수가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믿고 세례 받아
신앙 생활 하면서  영적인 신랑인
예수님을 맞아 들여 구원 받도록 합시다.
 
율사들이 겸손과 봉사로 과부들을 섬겨야 되는데
섬기지 않고 등쳐 먹는 것이 심판장이며 지옥에 속한 사람들이며
묵시록13장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도 세례받을 때 평신도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을
받게 되는데 사제직은 우리들이 매일 매일 삶에서 희생제물을
가지고 미사에 참여했을 때 사제직에 참여하는 것이며
 
예언직은 복음 선포할 때 예언직에 참여하며
왕직에 참여하는 것은 봉사를 함으로써 왕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율법에서 차원을 달리하여
복음과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데, 이 때 율법에서 복음차원으로
오는 것이 수난 받고,죽고,부활하는 것입니다.
 
부활해야 사랑의 사람이 되며 율법에서 선악으로 판단하고
잘했느냐? 못했느냐? 행위를 따졌던 사람들이 내 안에 계신
사랑의 하느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하게 봉사해야 하는데 율법에 있을 때는 자기를 자랑하고
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하에 있을 때는 내가 율법을 잘 지켰는데
당신은 율법을 잘지키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자기를 들어 내기를
자랑하고 높아지려고 하는 육적인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만나면
자기는 점점 작아지고 하느님을 점점 들어내십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자랑은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우리들의 자랑은 결점만 자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겸손하고 섬기며 봉사하는 사람이 됩시다.
 
 
38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설명:
이 구절도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 같은 사제들이 가난한
과부들의 재산을 등쳐먹는단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이 과부가 영적으로는 영적인 남편인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남자나 여자나 모든 사람을 말하기 때문에
 
차원을 달리해서 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영적으로 과부가 될수가 있고
고아가 될수 있고 이방인이 될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루카 21,1-4)
 
말씀의 예복을 입고 그리스도의 형상화가 되어 부활하여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 가면서
나를 산제물로 봉헌하는 것이 가장 큰 봉헌이며
물질적인 봉헌도 중요하지만
마음으로 믿음으로 봉헌하는 것은 더 값진 봉헌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생이 주일날 봉헌할 때
헌금함 옆에 계속 무릎 꿇고 있으니까 신부님께서
'너 왜 아직 거기 있느냐'고 물으시니까
'저는 헌금할 돈은 없지만 저 자신을 봉헌하오니 저를 받아 주십시요.
라고 기도 하고 있는 중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봉헌의 의미를 더욱 묵상하게 됐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많이 있는 가운데 조금 내는것 보다는
없는 가운데 절약해서 쓰지 않고 헌금해서
나눔을 할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설명:
하느님께 봉헌하는 헌금은 구약에서는 십일조이지만
신약에서는 산 제물로 우리 자신을 전부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12,1)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육적인 물질보다는 마음을 보시기 때문에
내가 돈 있으면 돈을 헌금하고,
돈이 없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하느님을 위하여
바치고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