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느님의 언어<와>인간의 언어 [교만한 자들(8)에게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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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장이수 | 작성일2009-04-22 | 조회수500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요한복음서 3, 31 -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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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하느님의 말씀' 아래에 (안에) 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해석해 주셔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드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자신(인간)의 생각(마음, 뜻)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서는 자기 자신(인간)을 알고자 힘쓰는 자세입니다.
우리 주위에 이미 알려진 '그 부류의 사람들'을 보게 되면
전혀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이 그들 안에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오직 '거짓 메세지' (언어, 개념)들로만 자기 안에 가득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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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바르트의 신학 언어 ]
인간 = 신 [ '인간의 진리'를 만들려는 유혹 ]
개념에 의하여 대상을 사유하는 것이라면 <계시의 사유>도 다른 일반 대상의 사유와 형편이 크게 달라질 수 없으리라는 추측이 강하게 작용한다. 그만큼 두 사유 사이의 거리는 가깝다.
그리고 ''하느님의 진리의 순환'' 이란 명제를 주제화 할 수 있다는 것이 <''하느님의 진리''를 ''인간의 진리''로 만들려는 유혹과 구분되어야 하는 필연성을 바르트는 말하고 있다.
이는 믿음의 시련과 연관되어 있다. 신앙이란 결코 값싼 믿음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참된 신앙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위한 영적투쟁의 원천>인 것이다. 이 말은 하느님 인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으로 드러나시는 곳, 하느님께서 하느님으로 말씀하시는 곳, <인간의 사변 속으로 환원될 수 없는 영원하신 하느님의 세계>, 하느님의 진리가 우리의 사유를 주장하지만 우리는 그 진리에 대하여 사실적이며 존재적 진리임을 증거할수 있을 뿐 사유의 초월성에는 대단히 주의하여야 한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인간의 한계와 하느님의 진리를 알게 하는 참되고 영원한 경계에 대한 올바른 언어의 발견>은 그리스도론 적으로 그리스도론의 문장들의 안이나 밖이 아닌 <결국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게 된다. 둘째, 타는 목마름으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자리를 지켜 나가면서 구체적이며 분명하게 이 세계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끊어진 길을 이어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화해이며 하느님의 진리이다. 이 화해와 사랑은 막힌 것을 뚫는다. 신학적 언어는 <인식론적인 문제를 실천적인 진리에로 옮기는 진리의 문장>이어야 한다. 이렇게 신학 안에서 <인간의 언어로 자신을 전달(계시) 하시는 하느님>은 인간 가운데서 인간을 통해서 길을 내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섬김은 인간에 대한 봉사가 되어지는 것이다. (이 세계에 대한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2008-04-24 오전 12: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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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인간을 해석하시는 것이다 성경 말씀 그 언어 자체보다는 그 말씀의 언어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먼저 볼 수 있서야 한다 '말씀이 사람 되신' 주님께서 ㅡ 인간의 실존을 이해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에 대한 말이나 하느님에 대한 사유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느님에 대한 말씀 가운데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느님을 하느님께서 사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스스로 사유하는 길을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길은 어떤 길인가? 성서 안에 하느님을 사유하는 길이다. 성서를 성서로써 하느님의 계시를 담은 책으로써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성서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
"성서를 성서로써 하느님의 계시를 담은 책으로써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성서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 = 백인대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 백인대장의 신학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말씀의 언어 안(이면)에 먼저 주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 신덕 ]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시어 사람 가운데 살아 계시도록 자신을 비워 드린다면 피조물의 눈물과 아픔은 사라지게 됩니다. 인간이 말씀(하느님)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느님)이 인간을 해석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려 주시는 분은 성령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홀로 하느님을 온전히 아신다. (게시자 : 그러므로 인간이 하느님을 진실로 경외(의존)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진리'를 만드는 '인간 = 신이다'는 엉터리 사유(판관, 신)를 하게 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52> 죄는 인간이 하느님보다 인간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하느님을 무시하고 거스리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교리서 398> 초자연적인 하느님과의 합일(특히, 성체성사)을 '참으로' 믿지 않는 '인간 진리'에 빠진 사상하고는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 , 5월13일 제 5차 중남미 개막연설에서> 사유의 지평에서 신을 제외시킨 자는 누구든 거짓된 실재론에 빠질 수 밖에 없으며, 그 결과 장님이 골목길을 헤메 듯 사유의 방향을 상실, 실재, 현실에 대한 파괴적인 대책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올바른 실재관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을 기반으로 수립된 실재관이다. 하느님을 인정하는 자만이 (인간 자신의) 실재를 알고 실재에 올바르게 그리고 진실로 인간적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2008년 9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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