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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153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5-12 조회수432 추천수5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부활 제5주간 화요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7-31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왜 신앙생활을 하는가 하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은 구원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또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많은 답이 나올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구원을 강조하고 있지만 구원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구원이 다르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도 백 사람이면 백 사람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구원이 다르므로 올바른 구원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려주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오늘 묵상을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은 구원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구원은 바로 평화이고 평화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평화가 아니라 "내 평화"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먹는 일도 없는 아주 잔잔한 호수와 같은 그런 마음의 평화입니다. 이렇듯 모든 종교는 마음 하나 다스리는 것이 거의 전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의 평화'보다는 욕망을 충족시켜서 구원받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재물이 많은 것을 구원으로 생각하고, 출세하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하고, 남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하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는 정반대의 삶을 사셨으므로 우리의 관점에서는 구원받지 못하고 가장 비참하게 돌아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닮아서 '마음의 평화'를 통하여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이므로 이와 다른 삶을 사는 것은 정통과 이단의 이런 구분조차도 필요 없는 비 그리스도교인 일 뿐입니다. 지금 이단논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비 그리스도교인끼리 서로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그런 모습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平和에서 '平'의 의미는 높고 낮음이 없어 물의 흐름이 멈춘 가장 평평한 상태입니다. 和의 의미는 오케스트라의 하모니보다 이를 더 잘 설명 할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동양사상에서 和와 반대되는 것은 同입니다. 和는 화합과 조화를 뜻하고 同은 자기 중심적 생각을 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이런 자기 중심적 욕구를 모두 죽여서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룬 상태 즉, 잔잔한 호수와 같이 아주 고요한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공자님은 논어 자로 편에서 '君子는 和而不同하고 小人은 同而不和'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알려주신 평화의 의미는 군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군자는 조화와 화합을 통하여 마음의 평화를 이미 찾은 사람이며 소인배는 모든 것을 나와 같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하고 늘 조바심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유일신 신관으로 대표되는 우리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유일신관에서 벗어나는 것은, 특히 교리에 벗어나는 것은 인정할 수 없으므로 내부적으로는 물론 두 종교 간에는 늘 대립과 반목의 역사였고 이로 인해 인류 역사에 숱한 불행을 안겨 주었으며 지금도 중동은 여전히 화약고입니다. 유일신 사상에 대하여 마하트마 간디는 ‘참이 하느님이다’로 정의하였습니다. 이처럼 참을 찾는 구도의 종교가 되지 못하고 지금처럼 ‘내가 참이다’고 서로 주장하면 우리 인류는 앞으로도 여전히 불행을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세금논쟁에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감탄하였다고 하였으나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탄하였는지는 의문이며 우리는 이 말씀을 또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자리를 꿰차고 있으므로 그 자리를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너희들은 구도의 삶이나 살라는 예수님의 준엄하신 충고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것을 더 이상 탐내지 말고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이 세상에도, 우리 마음에도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황제의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습니까? 또 우리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습니까? 모두가 하느님의 것입니다. 참된 유일신관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 올바른 유일신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유일신관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러 사용하며 자신들이 하느님을 독점하는 것입니다. 우주질서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을 어떻게 종교의 이름으로 독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단지 그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 갈 뿐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독점하면 독점한 자가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세상에 알렸기 때문에 하느님을 독점한 세상의 우두머리가 예수님을 죽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정의를 외치는 것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과 아픔을 함께하며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잘못 등을 치유하자는 和의 목소리가 있으며 내 생각이 정의이므로 자신의 생각만을 부르짖는 同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和의 목소리인지 同의 목소리인지 조차 구분 못하는 사람들은 종교인의 양심으로 이 사회를 고발하는 것조차 매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和의 목소리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려주고 이 땅에 평화를 이루자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므로 이조차 반대하는 것은 이미 세상 우두머리가 된 사람들과 이를 추종하는 자들이 하는 소리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속적 욕구를 이미 초탈하였기에 세상의 우두머리도 전혀 두려워하고 있지 않습니다. 길위의 신부님은 내가 각시가 있냐, 자식이 있냐, 집이 있냐, 기다리는 가족도 없고, 집도 없으므로 아무 곳에서나 잠 자는 곳이 내 집이므로 세상 우두머리는 두렵지 않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속적 욕구에 집착하기에, 이런 인연들 때문에 세상의 우두머리가 두려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 신앙은 세속적 욕구를 모두 죽여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그 모든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리고 창조의 질서에 순응하여 '마음의 평화'를 얻어서 구원받는 신앙임을 묵상하였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세상의 우두머리가 잡으러 올 시간이 다가옴에도
한점 흐트러짐이 없이 마음의 평화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저희도 그릇된 유일신관을 모두 버리고
참 하느님 한 분만 섬기는 바른 신앙인이 되어
자신의 평화는 물론 세계 평화에도 기여하는 평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평화의 성령께서 저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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