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노무현 연가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9-05-31 조회수496 추천수7 반대(0) 신고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참가기





29일 오전 10시 20분쯤 대학생 아들녀석과 함께 서울 합정역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탔습니다. 시청역에서 내려 8번 출구 쪽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출구가 막힌 상태였습니다. "서울광장으로 나가실 분들은 10번이나 11번 출구를 이용하시라"는 안내 방송이 지하도 안에 꽉 차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우리는 비교적 긴 걸음으로 10번 출구를 이용했고, 지상에서도 보이지 않는 서울광장을 향해 긴 걸음을 했습니다. 서울광장 주변에 다다르니 노란 종이모자를 나누어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쁘게 손을 움직였고, 나를 보더니 나이 먹어 뵈는 사람에 대한 배려인지 내게는 모자를 조립해서 주었습니다.

우리는 근처에서 노란 풍선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노짱'의 얼굴과 함께 '내 마음속 대통령'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두 개를 더 얻었습니다.


▲ 노란 종이모자와 노란 풍선 / 우리 부자는 서울광장 가장자리에서 노란 종이모자와 노란 풍선을 얻을 수 있었다. 사용한 후 버리지 말고 집에 가지고 가 오래 간직하기로 했다.  
ⓒ 지요하  영결식

내 휴대폰에는 누군가가 보낸 문자가 들어 있었습니다. '11시 영결식, 동아일보사 일민미술관 앞으로 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발신인의 전화번호는 휴대폰 번호가 아니고, 지역번호가 02로 되어 있는 일반 전화였습니다.

몇 번 통화를 시도했지만 받지를 않아서 누가 문자를 보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아는 얼굴을 만나게 되기를 기대하며 서울광장을 우회한 다음 동아일보 쪽으로 긴 걸음을 했습니다. 동아일보 건물을 본다는 게 지레 떨떠름한 기분을 안겨주더군요. 나는 아들녀석에게 "아빠가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 작가'지만, 20년 이상 구독해오던 동아일보를 지난 2001년에 끊어버렸다"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걷는 중에 쉽게 입수한 다소 두꺼운 노란 종이에서 '조중동'이라는 이름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에서 만들어 나누어주는 그 종이의 한 면에는 노짱의 얼굴과 '내 마음속 대통령'이라는 말이 적혀 있고, 다른 한 면에는 '조중동은 사죄하라'는 고딕체의 큰 활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 동아일보 앞 / 우리 부자는 동아일보사 일민미술관 앞의 나무그늘에 앉아 경복궁 안의 영결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옛날 젊은 시절 신춘문예 응모 원고를 들고 드나들었던 동아일보사 건물을 보며 슬픈 감회에 젖어야 했다.  
ⓒ 지요하  영결식

휴대폰 문자 때문에 동아일보사 쪽으로 가는 길에서 입수한 노란 종이에서 '조중동'이라는 이름을 접하고 보니, 아들녀석에게 또 한번 동아일보와의 과거 인연과 절연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동아일보사 일민미술관 앞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일민미술관 건물을 잠시 동안 망연히 바라보았습니다. 동아일보사가 옛날에 사용하던 건물이었습니다. 신춘문예 응모 원고를 들고 고색 창연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던 젊은 시절의 무겁던 호흡이 상기되면서 다시금 심호흡을 하게 되더군요. 1970년대 중반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때 동아일보에 격려 광고를 내며 뜨겁게 마음을 불살랐던 젊은 시절이 아련히 그리워지기도 하고…. 그런 그리움들 때문에 오늘 더더욱 눈물을 머금게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우리 부자는 잠시 나무그늘에 앉아 건너편 조선일보 사옥 벽에 부착된 멀티비전으로 경복궁 마당의 영결식 장면을 보기로 했습니다. 나무그늘을 골라 제대로 앉긴 했지만, 동아일보 건물 앞에서 건너편 조선일보 사옥을 본다는 것은 사실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저 화면을 보기는 해야겠고, 화면을 보자니 바로 위에 붙어 있는 '朝鮮日報'와 '조선일보', 두 개의 이름 글자들도 봐야 한다는 게 되게 고통스럽네."

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법 큰소리여서 주변의 여러 사람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울며 겨자 먹는 기분인데요"라는 사람도 있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 조선일보 사옥 / 조선일보 사옥의 멀티비전을 볼 수밖에 없는 지점에 있었다. 화면을 보자니 어쩔 수 없이 '조선일보'라는 글자도 봐야 하는 것은 고통이기도 했다.  
ⓒ 지요하  영결식

나는 조선일보라는 글자 밑의 멀티비전을 고통스럽게 보면서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조사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고, 송기인 신부님이 천주교 차례 종교 의식을 거행할 때는 성호를 긋고 나서, 수녀님들이 부르시는 고별식 성가를 함께 부르기도 했습니다. 태안성당에서 성가대 활동을 오래 하고 있는 나로서는 악보가 없어도 고별식 성가를 따라 부를 수 있었습니다. 고별식 성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였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내외가 분향을 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모습이 화면에 비치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습니다. 환호하는 함성이 아니었습니다. 야유의 함성이었고, 비탄의 소리였습니다.

그 한 맺힌 소리들을 들으며 나는 순간적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저 이명박 대통령으로 하여금 수많은 국민들의 한탄에 귀를 기울이게 해주십시오. 저 7.80년대의 수법으로는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어떤 남자 분이 근처에서 노란 종이를 나누어주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도 그에게 가서 종이를 두 장 얻는데, 한 사람이 그에게 "이거 어디서 났습니까?" 물었습니다. "문방구들을 여러 군데 다녔어요. 의외로 노란 종이가 많지를 않대요. 여러 문방구에서 사서 모은 거예요." 자기 돈으로 노란 종이들을 구입했다는 얘기였습니다.

종이를 얻은 사람들이 각자 종이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종이 비행기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배우고 하는 풍경도 벌어졌습니다. 자신의 작별인사를 담은 종이 비행기를 노짱의 유해 차량에 날려보내려는 그들의 모습을 보자니 또 한번 가슴이 뭉클하더군요.   
 

▲ 유해 차량 위의 영정 / 유해 차량에 손이라도 한번 대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종이 비행기를 힘차게 날렸지만 멀리 날지 않아 더욱 섭섭한 마음이었다.  
ⓒ 지요하  영결식

영결식이 끝나고 잠시 후 노짱의 유해를 모신 차량이 멀리에서 나타났습니다. 연도에 꽉 들어찬 인파 속에서 나 역시 그 차량만이라도 제대로 보고자 애를 썼습니다. 차량이 지나는 비좁은 공간 가까이 나아가 차량에 손이라도 한번 대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건 이미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내 카메라로 노짱의 마지막 모습만이라도 담으려고 손을 들어올리면서, 카메라와 휴대폰을 추켜드는 수많은 손들을 보았습니다. 마치 숲을 이룬 듯싶더군요. 그 손들은 그대로 노짱을 향해 흔드는 '깃발'이기도 할 터였습니다.

나는 아들녀석과 함께 유해 차량을 따라 조금씩 어렵게 이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시청역 지하철 출입구 앞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길을 뚫고 서울광장으로 이동을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파에 밀리며 어찌하다 보니 지하철 출입구 안으로 들어간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너무도 아쉽고 섭섭했지만 이쯤에서 노짱과 헤어지기로 했습니다. 을지로 방면 2호선 열차를 타려고 이동하면서 나는 지하도 바닥에 떨어진 노란 모자와 노란 종이 인쇄물을 몇 개 주워 아들녀석의 큼지막한 가방 안에 넣었습니다. 내가 지녔던 모자와 풍선은 그대로 몸에 지닌 채 집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것들을 버린다는 것은 너무도 아쉽고 미안한 일이었습니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노란 종이모자와 인쇄물들을 보자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어쩌면 조중동이 사진을 찍어 '쓰레기 천지'라는 말과 함께 신문에 낼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조중동과 어떤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먹잇감'이 되리라는 생각에 정말 가슴이 무겁더군요.

나는 지하철 2호선 안에서도, 을지로 3가역에서 갈아탄 3호선 안에서도 노란 종이모자를 벗지 않았습니다.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칼국수로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도, 태안 행 버스 안에서도 줄곧 모자를 썼고, 태안에 와서 차를 가지고 마누라와 딸아이를 퇴근시켜 주러 두 학교를 가면서도 모자를 벗지 않았습니다.


▲ 인파로 메워진 길 / 유해 차량을 따라 이동하다가 더 이상 길을 뚫을 수 없어 시청역 출입구 앞에서 그만 작별을 했다. 너무도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었다.  
ⓒ 지요하  영결식

나는 서울 시청역 지하도에서 몇 개 주워온 노란 종이모자와 노란 종이 인쇄물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인쇄물 한 장은 '조중동은 사죄하라'는 말이 뒤에서 보이도록 내 승합차 뒷문 유리에 붙였고, 모자도 하나를 차에 싣고 다닙니다. 오래오래 차에 싣고 다니며 사용할 생각입니다. 손상되어 못쓰게 되면 집에 두고 있는 모자들을 계속 하나씩 꺼내어 사용할 생각입니다.

노짱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그런 식의 그리움의 표현을 쉽게 접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상실감과 박탈감이 안겨주는 이 깊고도 둔중한 슬픔과 억울함을 스스로 달래고 위무하는 방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공주에서 사시는 장인어른의 팔순 생신 행사 관계로 오늘 공주를 다녀왔습니다. 오전 10시쯤 공주로 출발할 때 묵주를 집어드는 내게 아내가 물었습니다. "오늘도 노 유스토 님을 위해서 묵주기도를 하실 거예요?" 그렇다고 하니까, "오늘은 팔순을 맞으신 장인을 위해서 기도하면 안돼요?" 하더군요. "당신은 친정 아버님을 위해서 기도해요. 나는 앞으로도 계속, 적어도 1주기까지는 노짱을 위해 기도할 테니까."

노짱을 위한 기도는 그대로 나 자신을 위한 기도이기도 할 터였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위안하면서 하느님의 위로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사랑이시고 자비이신 하느님께서는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나를 가상히 보시리라 믿습니다.

노짱이 비록 인권변호사 시절에 세례를 받기만 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신자라는 이름만 걸고 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 가슴이 증오심으로 가득 찬 사이비 신자들보다는 훨씬 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은 슬픈 5월이 이우는 5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나는 공주에서 돌아오는 길에서는 묵주기도 중간에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암송하기도 했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찬란한 슬픔의 봄을!"

최근에 개통된 당진∼대전 간 한산한 고속도로를 천천히 달리며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외우자니 또 눈물이 솟더군요. 
   
         
09.05.31 20:31 ㅣ최종 업데이트 09.05.31 20:31
ⓒ 2009.05.31 OhmyNews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