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16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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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순 | 작성일2009-06-02 | 조회수447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오늘의 묵상입니다.[연중 제9주간 화요일]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때에 13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14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16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적을 제거하는 데는 세금만큼 좋은 무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번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가도록 단초를 제공한 것은 태광실업의 박 연차에 대한 세무조사였습니다. 검찰의 힘이 아무리 막강하다 할지라도 '네 죄는 네가 알렸다'하며 마구잡이식 수사는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수사를 하려면 수사를 할 어떤 단서가 있어야 수사를 할 수 있지만 국세청의 세무조사만큼은 그 어떤 단서도 필요 없고 국세청에서 마음만 먹으면 아무 때나 세무조사를 할 수 있습니다. 세무조사는 그 어떤 제한도 없습니다. 세무조사를 1년을 하던, 2년을 하던 법으로 조사기간이 정해진 것도 없고 조사 인원도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납세자는 세무조사에 항거할 어떤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어 있지 않으므로 국세청의 처분만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세무조사를 하면 영업활동에 엄청난 방해를 받으므로 권력자의 지시를 받고 기업을 죽이려고 작심하고 세무조사를 하면 어떤 기업도 살아날 수가 없으므로 기업하는 사람은 세금 앞에서 만큼은 탈세여부와 관계없이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세무조사를 하여 세금을 탈루한 사실이 확인되면 검찰에 고발할 것인지 아니면 탈루한 세액만 추징할 것인지도 국세청의 고유권한입니다. 국세청에서 탈세로 검찰에 고발하면 검찰은 고발된 탈세사건을 재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그 기업에 대한 수사를 착수하므로 이러한 국가권력을 공익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집권자가 자의적으로 이용하면 국가권력을 사유화하게 되어 국가적으로도 엄청난 불행을 가져오므로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은 국익을 위하여 정당하게 사용되어야 하며 오늘 복음은 이런 가르침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올무에 단단히 걸려 드렸습니다. 어떤 대답을 한다하여도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고 대답하면 로마제국의 통치에 협력하는 것이 되어 민족을 배반한 것이 되고, 세금을 납부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납세거부를 선동한 죄로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함구하자니 그것도 답변하지 못하는 엉터리라고 무수한 비난이 쏟아지며 납세거부를 묵시적으로 선동하였다는 올무에 걸려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울무에 걸려들지 않고 예수님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말씀은 바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하신 이 말씀일 것입니다. 성경을 처음 접했을 때는 사실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세금을 내라는 말씀인지 아니면 세금을 내지 마라는 말씀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 해석이 어려운 것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그 속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과 어제 복음은 크게 보면 같은 말씀입니다. 어제 복음에서는 포도밭의 소작인들이 지주의 아들마저 죽여 가며 지주에게 바쳐야 하는 소출을 바치지 않는 탐욕스러운 모습을 묵상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정해준 각자의 몫에서 더 이상 탐욕을 부리지 말고 각자의 몫에 충실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황제가 세금을 민중들을 위하여 사용하면 세금징수는 합당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민중들의 것을 수탈하는 것이므로 황제의 것이 아닌 것을 황제가 빼앗아 가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계시며 또한 재물은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므로 황제의 것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질문했던 그들은 이를 제대로 알아 듣고 감탄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한 경우는 당시 유대교 지도자의 모습이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위를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하느님의 자리를 더 이상 넘보지 말고 하느님께 바친 제물도 더 이상 눈독 드리지 말고 하느님의 자녀들인 불쌍한 민중들을 위하여 사용하라는 충고를 하고 계십니다. 오늘의 관점에서 이를 재해석하면 집권자는 국민이 위임한 권력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뜻이며 우리 교회에도 이런 요소가 있다면 이런 요소는 시정되어야 하고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금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므로 교회를 위해서 사용하지 말고 하느님의 자녀인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충고입니다. 제가 입교를 결심한 것은 중세처럼 교회 권력으로 부터 보호받고자 입교한 것도 아니며 죽어서 천당 가겠다고 입교한 것도 아니며 구원받기 위해서 입교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며 이를 따르는 것이 사람된 도리라는 것을 알게 되어 이를 실천하려고 입교한 것이 유일한 이유이며 앞으로도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실천보다는 교리를 믿어야 하고, 교회를 위하여 교회를 다녀야 하고, 교회 또한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잘못된 것이 있으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충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라고 아무리 말씀하셔도 우리 마음속에 탐욕과 질투와 시기와 자리에 대한 욕심이 있다면 이를 결코 실천할 수 없으므로 탐욕도 버리고 질투와 시기도 버리고 자리에 연연하지 않아야 자비도 실천하고 사랑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우리 인생,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면 탐욕도 질투도 시기도 자리에 연연하는 추한 모습도 다 사라지고, 자비를 실천하지 마라고 하여도 자비를 실천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 땅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영성을 강조하지만 영성은 바로 이런 탐욕 등을 버리는 것이 영성일 것입니다. 구도의 길은 무엇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므로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비우는 것이 구도의 길이며 저희 교회는 저희보다 앞서 이를 실천하여 교회의 이런 모습을 보며 저희가 따를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 주기를 바라는 소망을 끝으로 오늘 묵상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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