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16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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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순 | 작성일2009-06-03 | 조회수409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오늘의 묵상입니다.[연중 제 9주간 수요일]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이번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애도기간에 이상한 현상을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노사모 사이트보다 더 노사모다운 사이트인 '서프라이즈'라는 사이트가 있습니다. 그곳 서프라이즈 게시판에는 이번 애도기간 중에 근조 리본(▶◀)을 일체 게시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인즉 노무현 대통령은 부활 할 것이므로 결코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보며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미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과 부활에 관한 논쟁을 하고 계십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고 있었으며 이에 반해 바리사이들은 부활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부활은 '육신의 부활'이므로 오늘 부활논쟁은 '육신의 부활' 에 관한 논쟁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인정하고 계시지만 '육신의 부활'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하신 이 말씀은 사후 재평가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불의에 맞선 삶은 생전에는 온갖 박해를 받지만 사후에는 반드시 재평가 작업이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잠시 머물다 갈 육신에 연연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런 삶을 살면 사후에 바르게 재평가되고 그 숭고한 뜻이 널리널리 알려지게 되므로 부활은 바로 이런 의미라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과 같은 말씀으로는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요한 6,63)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는 육신의 삶에 연연하며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른 '육신의 부활'을 믿는 신경을 고백하고 있으므로 언제쯤 이런 잘못된 가르침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요원하기만 합니다. 예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들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올 수 있었으며 예수님의 뜻을 바르게 알지 못한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결코 만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앞에서 언급한 서프라이즈의 게시판에서 답을 찾을 수 있어 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현존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살아가겠다는 우리의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언어와 사실언어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우리 신앙은 터무니없는 것을 믿는 기복신앙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는 '육신의 부활'은 고백언어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부활 교리 때문에 火葬을 금지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고백언어가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믿어야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육신의 부활'이 아니라는 뜻에서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른 교리를 우리는 왜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인지를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실 저는 복음 묵상을 몇 번이고 그만 두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리가 서로 다른 점을 묵상할 때마다 이런 묵상을 공개적으로 하는 저 역시 마음이 편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게 용기를 준 말씀은 바로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태 5,37)하신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죽어서 천당 갈 생각하지 말고 살아있는 동안 '사람의 아들'처럼 살라는 말씀입니다. 한치 앞도 알지 못한 저희들이 내세를 얘기한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이나 잘못되었다는 말씀이고, 죽으면 사후 평가만 남아 있을 뿐이며 천당이니 지옥이니 연옥이니 이런 곳도 없다는 말씀처럼 들려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단 하나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이성적이며 신비적 요소가 전혀 없는 진리의 말씀 그 자체이고 그 어떤 기복요소도 전혀 없는 말씀입니다. 이런 가르침이 교리에 의해서 잘못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지식은 이미 흘러간 과거에 관한 것이며 지혜는 미래를 살아가는 자산입니다. 성경적 지식이나 교리적 지식은 이미 과거의 것이며 성경의 지혜만이 우리 인류에게 밝은 앞날을 보장할 것입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의 <소로의 일기> 한 구절을 함께하며 오늘 묵상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늘 죽은 자들과 함께한다. 죽었어도 잊혀지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의 하늘로 올라간다. 아니 그들이 우리 세계로 내려온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죽고 나면 영영 잊혀진다. 형제자매라 하더라도 영영 기억 속에 잊혀지고 마는 것이다. 반면에 죽고 난 뒤에 살아 있을 때보다 더 가까워지는 이가 있다. 죽은 뒤에야 비로소 생전의 참모습이 드러내어 더 가깝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세상에서는 죽음으로 인해 서로 갈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가까워지는 이도 적지 않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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