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9.6.4 연중 제9주간 목요일
토빗6,10-11;7,1.9-17;8,4-9ㄱ 마르12,28ㄱㄷ-34
"가장 큰 계명"
감정 사랑, 기분 사랑, 마음 사랑은
약하고 다치기도 쉽습니다.
변덕스럽고 항구하기도 힘듭니다.
이래서 계명들이 있습니다.
계명들을 지킴으로
막가파 본능적 사랑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담고 있는 그릇과 같은 계명들이자
약하고 불완전한 사랑을 지켜주는
사랑의 갑옷 같은 계명들이요,
싫든 좋든 계명들을 지킬 때 항구한 사랑입니다.
바로 이게 계명의 긍정적인 측면입니다.
유다교의 계명은 무려 613개나 되는데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하라’는 명령이요,
365개 조항은 ‘하지마라’는 금령이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는
이 모든 계명들 중에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가 묻습니다.
일견 쉬운 듯 보이지만 어려운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참 명쾌합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갈림 없는 마음으로,
아니 전존재로 몸과 마음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나 깨나 하느님이 전부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살기위하여’ 주님을 이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랑해야 정신분열 없이
깨어 집중적으로 본질적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주님의 계명들 613개 조항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둘로 압축 요약됩니다.
아니 성경은 물론이고
모든 종교의 궁극의 근본 진리도
이 둘로 요약된다 생각됩니다.
사실 모든 계명들은 사랑을 담는 그릇들입니다.
주님의 계명은 기본정신은 사랑이요,
하여 주님의 계명들은 모두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이 빠지면
정말 공허하기 짝이 없는 계명들입니다.
율법의 계명뿐만 아니라
나라의 법이나 공동체의 규칙도 그 원리는 똑같습니다.
사람을 살려 자유롭게 하는 사랑의 법이나 규칙이어야 하지
억압하고 구속하여
사람을 죽이는 법이나 규칙이 되어선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에 감동한 율법학자는
적극적으로 공감을 표명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이 이중 계명의 실천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는
율법학자의 견해에 주님은 칭찬으로 화답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 멀리 있지 않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결여한
모든 전례 행위나 계명의 준수는 공허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전례, 기도, 노동, 순종, 정결 등
온갖 수행들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이런 수행들은 억지로 의무가 아닌
자발적으로 기쁘게 행하게 됩니다.
기도 역시 잘하는 비결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그 사랑의 표현인 기도는 열렬할 수뿐이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공동체 일치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공동체의 중심인 하느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할 때
견고한 공동체의 건설입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처럼
독서의 토비야 역시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과도 일치되는 사람들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
아내 사라와 함께 기도하는 토비야를 통해
역시 사랑의 이중 계명의 가정공동체 일치의 원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대대로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하느님 찬미로 하느님께 열렬한 사랑을 표현하는
토비야 부부입니다.
이어 서로 사랑하는 부부공동체를 위해
기도를 바치는 토비야입니다.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이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주님은 오늘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을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어
이웃 사랑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시편16,11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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