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9주간 금요일 - 산을 보려면 산에서 나와라
외국에 처음 나와서 살게 되면 문화의 괴리를 적지 않게 느끼게 됩니다.
제가 처음 유학 나왔을 때 머물 게 된 곳은 신부님들이 사는 기숙사였습니다. 저만 신학생이었기 때문에 신부님들이 미사 드릴 때 혼자만 밑에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못 알아들을 때였습니다.
한국 신학교에서 나름대로 엄격한 교육을 받은 저로서는 유럽 신부님들이 미사 드리는 것은 하나의 충격이었습니다. 먼저 어떤 신부님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미사를 드리셨습니다. 또 어떤 신부님은 감기가 드셨는지 경문 읽는 소리가 다 묻히도록 연신 코를 크게 푸셨습니다. 또 어떤 신부님은 팔짱을 끼고 짝 다리를 집고 미사를 드리셨습니다.
나중에서야 그런 것들이 여기에서는 큰 문제가 안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유럽이 그래서 참 자유로운 나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하는 것처럼 무심코 재채기를 하였는데 또 그것은 여기에서는 예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코를 아무리 크게 풀어도 괜찮지만 재치기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재채기를 소리 내지 않고 하는 법을 익혀야했습니다.
한 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또 다른 나라에서는 어리석게 보이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미녀들의 수다를 보면 이런 문화적 차이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들은 한국 어린이들이 그렇게 공부에 시달리는 것이 가장 불쌍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어머니들은 공부 안 하고 노는 아이들을 가장 불쌍하게 생각 할 것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이렇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닐 수 있구나!’라고 느끼며 마음과 시야가 조금씩 넓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유학생활 몇 년을 하고 한국에서 공부한 사제들이 왔습니다. 저는 부제였고 복음을 읽을 때였습니다. 한국은 복음을 읽기 전에 손을 합장을 하고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그러나 저는 습관대로 손을 벌리면서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라고 하였습니다. 미사 끝나고 이것에 대해 한국에서 공부하신 신부님으로부터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한국 신학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데 유럽은 좀 엉망이라는 것입니다.
다행히 일행 중에 전례를 공부하는 신부님이 계셔서 전례 상으로는 손을 벌리던 모으던 아무 상관이 없다고 일러주셨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본질보다는 형식에 얶매여 살도록 교육을 받아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먼저 문제 제기를 하십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정말 성경에서도 다윗의 별이라든가 다윗의 왕좌를 영원히 이을 메시아가 예견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는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까지 적혀있습니다. 그래서 동방박사 세 사람에게 율법학자들이 메시아가 날 곳이 베들레헴이라고 일러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그런 믿음을 지니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마태오는 그의 복음에 처음부터 예수님의 족보를 쓰며 다윗의 후손임을 명확히 밝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 될 수 없음을 다윗 스스로가 쓴 시편을 근거로 들면서 증명합니다.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메시아는 겉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이렇듯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하는 이들도 찾아내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분을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여 성경을 적용시켜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모자이크와 같은 것입니다. 한 부분을 떼어내서 전부인양 말한다면 오류에 빠져 이단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보아야 더 너그러워지고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의지도 없고 잘 살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를 기준으로 판단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니 저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들의 전부를 본다면 어떤 면에서 나보다 못한 사람일지라도 나보다 더 큰 인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저도 많이도 배우고 변하게 되었습니다.
장기를 직접 두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제 삼자가 되어 훈수를 두면 잘 보이는 것을 경험하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서 보면 더 잘 보이게 마련입니다. 산 속에서는 산이 보이지 않습니다. 부분을 보지 말고 전체를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정말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파는 사람만큼 위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욥은 아무 죄도 없지만 수많은 고통을 받습니다. 당시의 믿음으로 보면 의인이 고통 받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까지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는 욥을 나무랍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하느님의 뜻이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완전한 진리는 오직 하느님 한 분입니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나와 또 많은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도 하느님의 절대적 진리 앞에서는 틀릴 수도 있다는 유연한 마음으로 삶과 사람을 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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