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6월 13일 토요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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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병규 | 작성일2009-06-12 | 조회수596 | 추천수14 | 반대(0) 신고 |
6월 13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 마태오 5,33-37 “아예 맹세하지 마라.”
<혹시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면>
‘맹세 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권고를 묵상하면서 같이 살았던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 녀석들 저한테 거짓 약속 엄청 많이 했거든요.
“신부님, 이번 한번만 도와주세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두고 맹세합니다.”
“신부님, 나중에 내가 어른 되면 돈 많이 벌어서 1년간 외국 여행 시켜줄게요. 왜요? 거짓말인줄 알고? 두고 보세요.”
그런 아이들 못지않게 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간 아이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많았는데, 이런 별명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양뻥’ ‘양구라’ ‘깡냉이’...
원인이야 이렇습니다. ‘주말에 같이 놀러가요’ ‘영화 하나 보여줘요’ ‘한 잔 사주는 거죠?’ ‘생일선물로 반지 사주기로 약속한 것 안 잊었지요?’ 등등의 조금은 일방적이고도 무리한 아이들의 요구 앞에서 늘 갈등을 하게 됩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면 애당초 안 된다고 하면 될 텐데, 마음이 약해서, 그리고 때로 건성으로, 그래 약속, 그럼 그러지, 하고 쉽게 약속해서, 나중에 아이들 실망하게 하고, 삐치게 만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돌아보니 이웃들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종신서원 때 잔뜩 긴장해서, 그러면서도 폼은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아가면서, 하느님께 약속드렸지요.
“저의 형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장 신부님 앞에서, 살레시오회의 회헌에 명시된 복음적 길을 따라 평생토록 순명, 청빈, 정결을 살도록 서원하나이다.”
매년 연례피정 끝에 서원을 갱신할 때 마다 가장 먼저 드는 느낌은 하느님 앞에 송구스러움입니다. 형제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총장 신부님 앞에서 발했던 순명, 청빈 정결 서원을 오늘 나는 과연 어떻게 지켜나가고 있는지 돌아보면 한심할 뿐입니다.
제 사제 서품 상본에 적은 내용이 또 떠오르는군요. 사제 서품 상본에는 한 평생 사제로 살아가면서 삼을 모토를 적게 되지요. 돈보스코의 아들이니만큼 당연히 돈보스코의 좌우명을 그대로 따라 적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청소년) 위하여 공부하고,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여, 여러분을 위하여 살고, 여러분을 위하여 나의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점점 더 부끄러워지는군요. ‘차라리 그런 심각한 서약을 하지나 말던지. 더 심사숙고해서 서원을 했어야지, 상본에다가는 어느 정도 적당한, 지킬만한 글귀를 적었어야지’ 하는 후회가 됩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한계, 나약함, 지속적이지 못한 속성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인간의 언약, 인간의 약속, 인간끼리의 계약은 근본적으로 미덥지 못한 것입니다. 유한합니다. 세월의 흐름 앞에 허물어지기 마련입니다.
불과 몇 십 년 세월 안에 생생히 체험한 일입니다. 한때 목숨까지 걸었던 이상적인 가치관들, 생사를 함께 하자던 동지들, 함께 설계했던 장밋빛 미래...세월과 더불어 많이 퇴색되어갔습니다. 다들 떠나갔습니다. 신기루처럼 사라져만 갔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있어 부담되는 언약, 지키지 못할 서약, 항구하게 지속되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기보다는 이렇게 말해야겠지요.
“혹시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면 제가 노력해보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부족해서 어쩔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158번 /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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