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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비폭력만이 살길이다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15 조회수418 추천수4 반대(0) 신고
 
 
 

비폭력만이 살길이다 - 윤경재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5,38-42)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폭력으로 폭력을 제어하려 했던 모든 시도는 결국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언제나 폭력의 악순환만 되풀이 하였습니다. 뜻이 아무리 좋았어도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는 혁명은 언제나 또 다른 폭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왕권파의 과도한 압제에 대항하여 일어났지만, 용서를 몰랐기에 피의 숙청을 통해서 더 큰 폭력을 초래했습니다. 고삐 풀린 혁명군은 심지어 종교를 탄압하고 사제들을 사형에 처하는 죄까지 저질렀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사건 직후 프랑스에는 왕정 때보다 오히려 기혹한 공포정치가 판을 쳤습니다. 종교와 양심까지 팔아 버린 프랑스는 피에 굶주린 늑대들의 사냥터가 되어버렸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인류 역사에서 뚜렷한 하나의 표본적 사건이었습니다. 곧이어 예전의 왕정보다 더 강한 전제주의 황제인 나폴레옹의 통치를 불러들였습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르고야 맙니다. 인도의 간디는 이런 역사를 통해서 비폭력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서되 무저항 정신으로 맞서 결국 100여 년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탈출기에서도 이런 폭력의 악순환을 읽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파라오가 저지르는 구조악인 폭정에 신음하는 동족의 고통을 보고서 의분을 느꼈습니다. 파라오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노동력 착취, 인구 증가를 방지하고자 산파를 이용한 생명의 파괴와 신생아 학살령을 내렸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유 없는 폭행이 공공연하게 동족들에게 자행되는 것을 보고 의분한 모세도 폭력으로 대응하였습니다. 그것이 사태를 변화시킬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폭력을 휘두르는 이집트인을 때려죽이고서 모래 속에 묻어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폭력은 사태를 악화만 시킬 뿐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억압 받던 동족들에게 오히려 모욕과 위협을 당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파라오는 모세를 죽이려 하였고 그는 졸지에 왕자의 처지에서 떠돌이 도망자가 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와 달리 모세는 미디안 땅 우물가에서 비폭력적 대응으로 여인을 구했습니다. 힘으로 질서를 어지럽히는 목자들에게 쫓겨난 여인을 보자 그는 일어났고, 그 딸들을 도왔고, 양떼에게 물을 길어 먹여주었습니다. 여기서 세 가지 동사로 표현된 모세의 개입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집트에서 뼈아픈 교훈을 겪은 모세는 미디안에서 생명을 빼앗는 폭력이 아니라 질서와 생명을 보존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자 그는 미디안 사제에게 환대를 받았습니다. 부인과 아들을 얻게 되었고 오랜 정화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랜 기간 이스라엘의 외침을 듣고 계셨습니다. 때가 되기를 인내하며 기다리셨습니다. 성경저자는 이집트 종살이가 수 세대 흘렀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아주 오랜 뒤에 이스라엘의 현자와 예언자들은 이 하느님의 침묵 시간이 실제로는 헛된 시간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려한 인간적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만드는 시기였다는 자각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 익명의 제2이사야는 바빌론 유배라는 고난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침묵’과 비폭력으로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버릴 ‘고난 받는 어린양’을 인류에게 예언하였습니다. 제2이사야는 45,15절에서 “자신을 숨기시는 하느님, 그분이야 말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라고 외쳤습니다. 또 그는 ‘고난 받는 어린양의 노래’를 통해 그분은 숨어계시되 고난에 동참하시는 분이었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하느님께서 직접 역사 안에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정말 곧이곧대로 알아듣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워하며 기억하는 대목입니다. 예수께서는 악인에게 대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악인은 자신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하느님의 질서를 마음대로 어지럽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질서를 유지하는 길은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보여주신 진리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죄가 없으셨지만, 인간의 죄에 동참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이 침묵만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함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악인에게 비폭력으로 대응하는 실천적 실례를 3가지나 보여주셨습니다. 뺨을 때리는 터무니없는 모욕에는 관용으로 대처하고, 가진 자가 더 빼앗으러드는 사회악에는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자세로 극복할 것이며, 도를 넘치는 권력이 행사하는 억울한 처사에는 희생과 봉사로서 무력화하라는 요청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두 가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인격을 손상하는 일이 없게끔 거절하지 말고 요청하는 대로 주고, 물리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요청하신 바는 실제로 당신께서 실천한 내용이기에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몸소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무저항의 자세와 하느님께 드리는 무한한 신뢰를 바라본 이방인 백인대장은 결국 자신들의 죄와 고통을 대신 짊어진 그분을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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