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11주간 화요일 - 완벽주의, 잘못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완벽해야한다는 것과 완벽해지려하는 것은 비인간적이 된다는 시각 사이에서 갈등을 해 온 것 같습니다. 또 사회에서는 정말 완벽주의란 말이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일반대학 다닐 때 한 여자후배와 함께 걸을 때 후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빠는 빈틈이 없어.”
그래서 자신이 들어올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때 그 말을 듣고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에게 완벽주의가 있어서 사람들이 다가오기 쉽지 않나?’
그래서 일부러라도 빈틈을 많이 보이려 노력했습니다. 본래 말도 잘 안 하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고 농담도 많이 하며 전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걸 원하는 건가?’
신학교에 들어와서는 이런 말도 들었습니다.
“형은 혼자는 잘 살지만 나중에 하느님께 가서 하느님이, ‘왜 너 혼자 왔니? 쓰러져가는 네 형제들은 왜 함께 데려오지 않았니?’하면 어떻게 할 거야? 쓰러질 땐 함께 쓰러지며 같이 가야 되는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먼저 완전해지면 주위 사람들도 함께 좋은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 형제들을 신경 쓰지 못했던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왜들 쓰러지고 그래?’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또 함께 쓰러져보기로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함께 울고 아파하고 싶었습니다.
사제가 되어서도 그런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신부님은 답답하다느니, 인간미가 없다느니,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안 산다느니, 사는 것이 군인 같다느니, 자신은 완벽한 사람은 싫다느니 하는 등의 참 많은 충고를 들었습니다. 저는 전혀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주위 사람들은 여전히 그런 시선으로 저를 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말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도 여러 번 그런 충고대로 되어보려고 했었지만 결국 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저에게도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함께 넘어지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혹 옆에 흔들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기대어 버틸 수 있도록 흔들림 없이 곧바로 서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주위 사람을 위해서도 더 좋습니다. 자존심이 있어서 나에게 기대려 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이젠 완전해지려고 하는 것이 절대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의 이 생각에 힘을 주는 가장 큰 말씀이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과연 불완전한 것이 인간적일까요?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기 때문에 사람을 완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 스스로 불완전해 진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 인간답다는 의미는 완전한 인간을 두고 말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처럼 완전할 수 없어.”라고 하며 자신의 불완전을 정당화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체성사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고 하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불완전한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처럼 완전하게 된다는 말은 ‘완전한 사랑’이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완전하다는 의미를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라.’라고 풀이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똑같이 미워한다면 하느님나라에서 칭찬받을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완벽주의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그건 옳지 않은 것이지만 하느님의 모습대로 더 완전하게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주눅들 필요 없습니다.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봅니다. 우리도 완전한 사랑을 바라보며 그 사랑을 닮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태양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가 닮도록 원하시는 완전한 사랑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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