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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혈하는 부인'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28 조회수567 추천수3 반대(0) 신고

 '하혈하는 부인'>(마르 5,25-34)
  -유광수 신부-

오늘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 여인도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병을 앓고 있는 부인이다. 이 부인은 어떤 여인인가?

 

복음이 이 여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12년 동안이나 하혈증을 앓고 있었고,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느라고 고생을 하였고, 가진 것마저 모두 탕진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더욱 절망적인 것은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혈하는 부인의 절망적인 상황을 부각시키는 표현이다. 이 부인이 처해진 상황이 곧 세례 받기 이전의 인간의 모습이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즉 죽음의 병을 치유 받지 못한 채 죄인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해주는 것이 곧 세례성사이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죽음의 병에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로 그리고 죄인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다.


 만일 오늘 이야기가
"12년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죽도록 고생만 하던 여인이 결국 죽었다."라는 이야기로 끝났다면 삼류 소설이야기로 전락했을 것이다. 만일 그런 소설이라면 "참, 안됐다. 불쌍하기도 하지!"라는 한 마디 말을 하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은 불행했던 한 부인의 삶이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졌을 뿐 아니라 구원의 은혜까지 받은 행복한 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이 부인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으로 돌아설 수 있게 되었는가?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라고 복음은 적고 있다. 즉 부인이 깊은 절망 속에 빠져있을 때 그녀를 구하게된 첫 번째 출발점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나서부터이다. 아마 "예수님"이라면 나병환자를 치유시켜 주셨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고, 또 더러운 영이 들린 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 주신 분이시라는 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분이시라면 자기 병도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생각했을 것이고 "죽기 전에 단 한번만이라고 꼭 그분을 만나 보았으면 원이 없겠다."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던 참에 '예수님'이라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이 부인이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과 일반 사람들이 듣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부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한가닥 희망을 갖고 마지막으로 매달릴 수 있는 분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이 부인에게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냥 지나가게 놔둘 수는 없는 이름이다.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듣는 이 순간은 적어도 부인에게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고,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시간이다. 이처럼 이 부인에게서 "예수님"과의 만남은 절대적이고 급박한 순간에 이루워진 일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둘러싸고 밀어대며 따라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부인은 그런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의 자세에서 예수님을 따라갔을 것이다.

 

 사람은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에 따라서 듣는 것도 다르며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서 들려오는 소문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다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이 부인의 절박한 상황이 예수님의 소문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 않았던가?

 

부인은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그 상황이 너무나 절박했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절실한 마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널리 퍼뜨려야 한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퍼지지 않았다면 이 부인은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이 부인처럼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이 많이 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신다.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을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4-15) 


 나에게 들려 오는 예수님의 소문은 어떤 소문인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나에게 어떤 느낌을 갖게 하는가? 나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전한 적이 있는가?

 

 우선 이 부인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다른 사람들과는 마음 자세가 달랐다.

복음은 "큰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댔다."고만 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따라다니는지 그 목적이 분명하지가 않다. 하지만 부인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간절한 생각으로 따라 다녔다.

 

부인의 자세는 맹목적인 따름이 아니다. 목적이 분명하고 자세가 진지하고 간절하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인지 아닌지 하는 의심이라고는 이 부인의 자세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께 대한 신뢰심은 한점의 부끄럼이 없이 순수했고 절대적이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그 믿음은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가?

 

이 부인의 마음은 두 마음이 있을 수 없다.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생각으로 예수님께 다가가는 그 부인의 발에는 힘이 들어 있고, 발걸음은 점차 빨라졌을 것이고, 가슴은 설레었을 것이고,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자신의 간절한 소원이 현실로 이루워지리라는 확신이 더욱 그녀를 흥분시켰을 것이다.

 

드디어 예수님의 옷에 손댈 수 있는 거리에까지 왔을 때 이 부인은 온 정성과 설레임과 신뢰심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을 것이다. 그 순간을 복음은 "과연 곧바로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라고 극적인 상황을 전하고 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믿음과 직접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그 믿음의 행동이 12년 동안이나 하혈하던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낫는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야고보 사도가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 14-17)라고 말한 믿음이 바로 이런 믿음이 아닐까? 이 부인은 "씨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마르 4, 8)라고 말씀하신 대표적인 모델이다.

 

 오늘 복음을 자세히 읽어 보면 "손을 대다."라는 말이 6번이나 반복해서 나온다. 그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손을 대다."는 말이 무엇일까? "손을 대다"는 것은 하나의 표현방식이다. 즉 마음의 외적 표현인 것이다. 이 부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손을 대는 것에도 여러 상태가 있을 것이다. 마음 없이 건성으로 만지는 것이 있을 것이고 이 부인처럼 온 마음을 다해 옷을 만지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읽지만 마음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읽을 수도 있다. 복음을 읽는다는 것은 이 부인이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온 정성을 다해 온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이 부인처럼 말씀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진다.'는  느낌으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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