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6.28,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29 조회수436 추천수3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9.6.28 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 
                                                            
지혜1,13-15;2,23-24 2코린8,7.9.13-15 마르5,21-43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하느님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까?
하느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있다는 자체가 하느님 체험입니다.
 
이를 얼마나 생생히 느끼고 사는가가 문제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늘 하느님을 생각하며 살라고 어디나 눈 들면 하늘입니다.
 
성무일도 때 마다 자주 눈 길 가는 창밖 풍경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
 
며칠 전 쓴 글을 나눕니다.

늘 봐도 늘 좋고 새로운
창밖 풍경 하늘과 나무
참 단순하다
하늘은 하느님이고
바람은 성령이고
초록나무는 수도승이다.
하늘 배경
바람에 춤추며 노래하는
초록나무들처럼
하느님 배경
성령 충만하여
찬미 노래 부르는 수도승들이다.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모든 사람들의 배경이 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평생공부는 오직 하나 하느님 사랑 공부뿐임을 깨닫습니다.

먼저 하느님 자랑부터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우선적으로 할 일이 하느님 자랑입니다.
 
매일 끊임없이 미사와 성무일도를 통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림으로
하느님을 자랑하는 일이 우리 수도자의 일입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아침 일어나자마자
하느님 자랑의 찬미로 하루를 시작한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오늘 1독서 지혜서의 하느님 자랑이 참 고무적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정의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세상의 본래 모습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마다 다 그 존재이유가 있으며
저마다 하느님의 좋으심을 반영합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바로 이게 축복 받은 인간 본연의 모습입니다.
 
하느님 없는 인간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는 인간 탐구는
끝내 자기를 발견 못해 허무와 절망으로 귀결됩니다.


인간의 불행은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감으로 시작됩니다.

하느님과의 단절과 불통이 불행의 시작입니다.
 
지혜서는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잊음으로 자초한 화입니다.
 
하느님과의 단절과 불통은
이웃과의 단절과 불통으로 이어지 지기 마련입니다.
 
성경은 이 관계의 단절과 불통을 죄라 정의합니다.
 
바로 창세기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
이 진리가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있습니다.

하와의 아담이 악마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께 불순종 한 결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 불통되고
이어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나와의 관계가
연쇄적으로 파괴되어 단절 불통의 관계가 되어버립니다.
 
단절 불통의 사람이나 공동체는 살아있으니
실상 죽어있는 사람이요 공동체입니다.
 
위의 하느님과 좌우사방의 사람들로 연결 소통되어야
사람도 공동체도 살아나고 자유롭습니다.
 
대부분의 문제들이나 병들의 원인을 추적하면
결국 단절과 불통에서 기인됨을 깨닫습니다.
 
오늘 날의 우리 현실은 단절 불통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모두는 하느님을 잊은, 하느님을 떠난 업보입니다.
 
바로 이 단절과 불통의 그 중심 자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십니다.
 
하느님과의 불통을, 이웃과의 불통을 소통으로 바꿔주시고자 오십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는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대로 바로 이 미사의 은총이기도 합니다.
 
이 미사은총으로 인한 소통의 현실을
어떻게 우리 삶의 현장에서 실현시키는가가 문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인들의 현실 참여는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한 관계를 깊이 할 때 샘솟는 내적힘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때 관계의 회복이요 살아나는 영혼 육신입니다.
 
우리의 미사와 성무일도의 공동전례가 궁극으로 목적하는 바도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때 내적변화에 치유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한 관계의 회복이요 원활한 소통입니다.
 
참 약하고 부족한 한계를 지닌 인간들입니다.
 
병과 죽음에 볼모로 잡혀 있는,
큰 인생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 같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야 생명과 자유입니다.
 
오늘 복음의 죽은 회당장의 딸과 열 두해 동안 하혈의 병을 앓던 여자,
바로 단절 불통의 현실을 상징합니다.
 
이 단절 불통의 병과 죽음의 현실에서
회당장은 믿음으로 생명의 줄이신 주님을 잡았습니다.
 
생명의 주님을 향해 마음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이어 회당장의 딸이 죽었으니
올 필요가 없겠다는 사람들의 말을
한 마디로 일축하시는 주님의 다음 말씀은
믿음 약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기도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마침내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십니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비단 죽었던 회당장의 딸뿐 아니라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죽어있는 모든 이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살아계신 주님께서 사랑으로 터치해 주셨을 때
죽음에서 풀려나 살아난 회당장의 딸 이었습니다.
 
열 두 해 하혈 병을 앓던 여자는
최고의 의사인 주님을 만나 믿음으로 터치한 결과
치유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만져줘야, 주님을 만져야 살아나는 우리들입니다.
 
생명과 사랑의 주님과의 스킨십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하게 되어라.”

병과 죄와 죽음의 온갖 불통의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원과 치유를 선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빛나는 태양 앞에 흔적 없이 사라지는 밤의 어둠처럼,
생명과 빛의 주님 앞에
저절로 사라지는 죄와 병과 죽음의 어둠의 세력들입니다.


하느님을 잊어버리면 영혼의 죽음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깊어가면서 충만한 존재의 삶입니다.
 
하느님은 마음의 눈을 밝게 하고 돈은 마음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하여 제가 늘 강조하는 품위 있는 삶의 우선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 믿음, 둘째는 건강, 셋째는 돈입니다.
 
하느님 믿음이 우선일 때
저절로 따라오는 건강과 돈이지만,
돈에 우선을 둘 때 욕심에 눈멀어 급기야 하느님도, 건강도 잃게 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살아계신 주님은 온 마음을 다해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를
말씀과 성체의 은총으로 치유해주시고
원활한 소통 관계를 이루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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