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3주간 목요일 - 인간은 ‘성사’적 존재
오늘 미사를 드리면서 봉헌 때 손을 씻으며,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라고 경문을 외우다가, ‘개신교 신자들에게 이런 예식을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라고 잠깐 고민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손을 씻는 것이지 맘속에 있는 죄를 씻는 행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손을 씻는다고 마음의 죄가 씻기지는 않듯이,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성체성사도 하나의 밀떡과 포도주에 불과하고 고해성사도 인간이 죄를 사해주기 때문에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은 육체를 지니면서부터 필연적으로 ‘성사적인 본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워낙 강하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들고 일어났기 때문에 자신은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대야에 물을 받아 손을 씻습니다. 물에 손을 씻는다고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은 그 행위로써 자신의 말에 대한 보다 강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있듯이, 육체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것들은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성사에는 항상 외적인 물질이나 말을 포함한 행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세례성사를 생각해봅시다. 세례성사에서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에게 세례를 베풉니다.”라고 말만 하고 물을 붓지 않으면 그 성사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물을 붓거나 안 붓거나 그 영혼의 상태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그 물이라는 물질과 그것을 붓는 행위가 예식 말씀과 함께 어우러지지 않으면 성사가 이루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 성사를 제정하실 때 항상 이런 외적인 요소를 포함시키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듯이, 그리고 그 분이 부활하셔서 여전히 육체를 지니고 계시듯이, 또 인간도 육체가 부활해야 온전한 구원이 되듯이, 육체를 지니고 사는 인간에게 내려오는 은총도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결합 되어야만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해성사로 넘어와 봅시다. 개신교에서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느냐고 하며 고해성사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과 직접적인 통교에 의해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개신교 신자들에게 들은 것은 그들이 아무리 울며불며 참회기도를 하여도 그리고 목사님이 다 용서되었다고 아무리 말을 하여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자신의 죄가 완전히 용서되었는지의 의구심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육체를 지니고 있는 인간은 영적으로만 만족할 수 없고 직접 자신의 귀로 죄의 사함을 들어야 완전히 만족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고 따지는 것은 지금의 교회에 대한 개신교들의 반발만이 아니라 유다인들이 예수님에게도 똑 같이 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중풍 병자를 데려옵니다. 중풍 병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는 유다인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하느님만이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이고 그렇다면 성전에서 행해지는 모든 속죄의 예식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으심을 보여주시겠다고 하시며 그 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 병자가 치유된 것을 보고 사람들은 저마다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당시 ‘병’은 곧 ‘죄’였습니다. 따라서 병이 치유되는 것은 곧 죄가 용서되는 것과 같았습니다. 누구도 그 사람의 죄가 용서되는 것을 알아차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죄의 용서’와 ‘눈에 보이는 병의 치유’를 결합하여 사람들에게 온전한 성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모든 성사들이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은총과 눈에 보이는 행위나 물질과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오는 단순한 ‘사람’의 아들, 예수님에게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런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했다고 하며 예수님 한 분만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음을 암시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세상을 심판하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포함하여 모든 권한을 아들에게 주셨듯이, 아들은 교회를 사랑하여 당신의 모든 권한을 교회에 주십니다. 사랑의 본질은 모든 것을 주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체적인 행위가 바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는 것입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리는 이 권한이 바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지어서 하늘나라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다시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권한이란 그 죄를 용서하는 신적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하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 하늘나라의 열쇠를 열두 사도가 나누어 사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열쇠는 오직 하나 베드로에게만 주셨기 때문에, 교황님께 일치하지 않는 사도단, 즉 교회를 떠난 주교들은 그 열쇠를 사용할 권한이 없어서 자동적으로 교황에게서 떨어져 나간 교회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사제들은 각 주교님들께 이 권한을 받아 죄를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저도 고해성사를 너무 자주 보는 것도 좀 이상해서, ‘상등통회’라는 것을 통해 죄가 용서받는다는 것을 믿고 열심히 통회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래봐야 그런 죄를 또 짓게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쩌면 하느님만이 아니라 내 자신까지 용서받았다고 속이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상등통회를 할 정성이 있으면 겸손되이 사제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경을 듣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고해성사가 싫어서 계속 냉담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 은총에 충실히 참여하는 것이 그런 선물을 주신 분께 대한 보답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