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괴 성모님 순례지 김웅열 신부님
†찬미예수님
더위에 병 안 들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잘 지내셨습니까?
태풍이 오늘 저녁부터 올라온다고 하는데 피해 없기를 바랍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사제는 서품을 받고 자기 고향에 가서 사목하지 않는다는 것 아시죠?
다시 말하면 감곡성당 출신 신부들은 죽었다 깨어도 감곡본당 신부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거기에 근거가 된 복음서가 오늘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에 가셔서 얼마나 수모를 당하셨는지...모릅니다.
사제가 어린 시절 내 과거의 모습을 다 아는 곳에 가서 권위를 가지고 사목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희 집은 구교집안이 아니고 아버지때부터 성당에 나가셨기 때문에 지금은 많은 분이 성당에 다니시긴 하지만 그래도 반 이상이 유교집안입니다.
집안에 큰 행사가 있을 때 가면, 천주교 신자인 집안 어르신들은 저를 굉장히 위해 주며 꼬박꼬박 “신부님!” 하시지만 신자가 아닌 어르신들은
“웅열아, 물 떠 오너라!”
아이구~~스타일 팍 구깁니다.^^
어떤 때는 어른들 술 한잔 잡수시면
“神父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장가가야지~~”
전혀 모르시는 거죠...8~90 되시니까
“어찌 사람이 ...씨를 뿌리고 살아야지!”
신학교 갈 때부터 못마땅하게 생각하셨으니까~~
솔직히 얘기하면 집안에 가기가 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당신의 고향에 가시며 수모를 당하실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왜 당신의 과거를 다 알고 있는 고향 나자렛에 가셨을까?
다른 곳으로 가실 수도 있으셨을텐데.....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삶을 사신 것이 아닐까!
왜냐?
분명히 고향에 가면 내 출신성분을 가지고 是非를 걸 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셨지만....
앞으로 당할 수모에 비하여 그런 수모를 당하는 연습을 하신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욕당하고...침 뱉음을 당하고.....
십자가 위에서 십자가에서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야말로 수모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혹독한 실험을 하신 겁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들려오는 소문은 들었을 겁니다.
“요셉의 아들이....응, 그 목수 요셉의 아들이 유명한 강사가 되었다네~~ 그런데 피정을 그렇게 잘 시킨대...”
고향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들었는데.....어느 날 예수가 동네에 온다는 소문이 돌고 사람들은 보고싶은 마음 반, 호기심반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우리도 알다시피 랍비가 되려면 유대인들은 일정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시험을 통과하여 자격을 얻어야 하는데....예수님은 신학교 출신도 아니고, 유대학교를 다닌 것도 아닌 방랑선생이었지요?
그런데 그 가르치는 내용을 보니까 놀라워!
듣던 소문대로 기가 막히게 가르치고 아주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지만 그것을 끌어당기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과거입니다.
‘아니야, 저것 사기치고 있는 거야...우리 동네 사람 다 알잖아~~
그 아버지 요셉은 집집마다 다니면서 닭장 고치고, 의자 고치고...식탁 고치던 그 요셉의 아들 아냐?
저 에미는 과부인 그 마리아 아들이잖아~~’
예수님의 신성쪽으로 다가서려 하지만..... 그걸 붙잡는 것 바로 선입관이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느님과의 만남에 있어서~~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이럴 것이다’ 하는 이 선입견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이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을 과거에 누구의 아들로
보았을뿐이지 예수님의 신성을 보지 못했던 겁니다.
이 선입견 때문에 우리 인생에 걸림돌이 될 때가 있습니다.
피정을 하러 갈 때 주로 차를 이용합니다.
Tape가 있기 때문에 주로 본당 차를 이용하여 피정지까지 갑니다.
그러나 가끔은 버스를 타고 피정을 갈 때가 있는데 버스를 타고 가면 기쁜 일이 많이 생깁니다.
여행할 때 사제관에서 귤이든지, 사탕 몇 개를 넣어 가지고 갑니다.
버스를 타러 가면 표를 받을 때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서울까지 1시간 반 동안 과연 내 옆에 누가 앉을까!
표를 살 때부터 가슴이 두근두근 합니다.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내가 먼저 앉아서 옆에 사람을 기다리는 때가 있고, 내가 빈 자리를 찾아가서 앉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내가 먼저 앉아 사람이 앉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사람이 버스에 올라오는데 보니까 얼마나 무섭고 험상궂게 생겼는지......
저는 즉시 기도했습니다.
“주님, 뒷자리도 텅텅 비었습니다. 저 사람 이 자리에 앉지 않게 해 주십시오.”
주님은 그런 기도 절대 안 들어 주십니다.
뒷자리도 비었는데... 그 사람은 ‘덜커덕’ 내 옆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재수 옴 붙었구나! 말 걸었다가는 얻어터지게 생겼다!’
묵주기도 하면서 한 20분 가다가 불현듯 ‘그래도 내가 명색이 신부인데 수십억 인구 중에 주님이 이 사람을 내 옆에 앉게 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텐데.....’ 하면서 용기를 내어 귤 하나를 권하며
“선생님, 이것 좀 드시겠어요?”
“신부님, 맞으시죠?”
‘옳거니, 신부를 알아보는구나!’
“네, 신부입니다.”
“신부님, 제가 냉담한지 20년 되었는데 본명이 베드로입니다. 신부님 앞에서는 죄인이지요.”
왜 그리 험악하고 이 세상 모든 고통을 짊어진 것 같은 얼굴을 했는지....
그 사람 지금 바람 핀 마누라 죽이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흥신소를 통해 어느 모텔에 있다는 정보를 듣고 죽이러 가는 길이라며 잠바 안 주머니에 종이에 뚤뚤 말은 부엌칼을 보여주며 “그 년놈 죽이고 저도 제 목 딸 겁니다.”
세상에~~ 20년 묵은 냉담하던 고기가 하나 걸려 들었는데..이게 칼 든 고기야!
칼을 아무리 달라고 한시간 내내 얘기해도 줘야 말이지~~
여러분 아시다시피 내가 말을 좀 잘 합니까^^
칼을 달라고 오만 얘기 다 해도 내놓지 않고
“신부님, 자꾸 그러시면 저 뒷자리로 갈 겁니다. 어차피 저는 인생 끝난 놈이고...지옥 갈 놈입니다. 조용히 불쌍한 저를 위해 기도나 한 번 해 주십시오”
결국 칼을 뺏지 못하고 유리창을 바라보며 묵주를 꽉 움켜쥐고 속으로 심령기도를 중얼중얼 ~~ 이 영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버스가 강남터미널에 우회전을 하며 꺾이는데 그 양반이 나를 툭 치더니
“신부님, 칼 받으십시오.”
하면서 주는 거예요, 어찌나 기쁘고 고맙던지...
“신부님 말씀대로 그 모텔방에서 내 아내만 끌어 내 오겠습니다...말은 이렇게 하지만 내 눈이 뒤집어질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장담은 못하겠지만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저는 차 안에서 강복을 주고 끌어안아 주며 “베드로씨는 그렇게 할 수 있을것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제가 영등포 쪽으로 피정을 갔는데 피정을 하는 하루 종일 머리는 어디에 가 있었겠어요?
‘오늘 베드로씨가 무슨 일을 저지르지는 않을까!’
그 다음 날 신문에 혹시 불륜의 아내를 죽인 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까......
그 다음 일요일 교중미사를 드리는데 한 가운데 머리 하나만큼 큰 남자가 앉았고 그 옆에 고목나무에 매미 달라붙은 듯한 쬐끄만한 여자가 미사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니 베드로씨야~~ 여자는 죄를 지었으니 미사 한시간 내내 울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아, 베드로가 부인을 데리고 미사에 왔구나!’
미사가 끝나고 사제관으로 불렀습니다.
그 베드로씨 얘기가 신부님과 헤어지고 난 다음에 모텔을 찾아 가서 흥신소에서 알려준 대로 몇 호 방 앞에서 한시간을 망설였대요.
‘차라리 돌아갈까...못 볼 것 보면 어쩌나~~’
주의 기도를 외우면서 문고리를 살짝 돌리니 문이 열려 있더래요.
‘이 연놈들이 배짱도 좋구나’
문을 열어 보니 남자는 이미 멀리 가 버리고... 부인이 입에 극약을 털어 넣으려고 하더랍니다.
그걸 보고 “나 너 무조건 용서한다....우리 무조건 집에 가자..내가 오늘 신부님 만나 살인하고 싶은 마음 없어졌다.”
이 말에 남자 품에 안겨 이 부인은 몇시간을 엉엉 울었습니다.
“우리 그 신부님 만나 고맙다는 인사 하러 가자!”
그 사람을 끌어안아 주고 밥 먹여 보내고 혼자 감실 앞에 가서 많이 생각했습니다.
만일 내가 내 옆에 앉은 인간이 험상궂다는 선입견 때문에 묵주기도 했으면 몇십단은 하고 올라갔겠지만 다음날 신문에 아내를 죽인 한 남자의 이야기가 분명히 나왔을 겁니다.
☆이러한 선입견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 만남이 어떤 만남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의 질과 색깔이 달라집니다.
여러분, 살아가면서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불편하게 만드는 것 중에 많은 것이 ‘이 인간 이럴 것이다.’, ‘저 사람 인상이 교활하게 생겼으니 이럴 것이다.’ ‘저 인간 소문 들어보니 바로 이렇다더라’
바로 선입견입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선입견의 노예, 희생물이 되신 겁니다.
‘이 사람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이 사람 그 마리아의 아들 아닌가?’
이런 분위기에서 설교와 기적을 행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명의라고 해도 살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 환자는 의사가 도움을 줄 수 업습니다.
☆영적으로 살려고 하는 의지를 신앙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이 보시고 병들어 있는 것 고쳐주시고자 하지만 그것을 거부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은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성체를 통해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랬을 때 성체를 맞이하는 우리들이 냉소적이고 때론 예수님을 원망까지 한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 어떤 치유도..기적도 행하실 수 없습니다.
유명한 聖畵중에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그린 화가는 10년 동안 기도하다가 영감을 얻었는데
<묵시록 3장 20절>
내가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나도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그 그림이 왜 그리 유명한 그림이 되었냐면, 밖에 문고리가 없어서 반드시 안에서만 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베드로야... 마리아야...루시아야...문 좀 열어라! 내가 들어가서 너와 같이 만찬을 하리라!”
<시편 81장 10절>
다만 입을 벌려라. 내가 채워 주리라.
입을 다물고 있을 때에는 예수님께서 아무리 들어오시려고 해도 들어오실 재간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은 우리 자신을 뜻하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변함없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우리를 찾아 오시지만....
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가 비판적이고/ 냉랭하고/ 무관심하다면
우리는 반성해야 됩니다.
☆예수님을 쫓아내는 나 자신이 되지 말고 예수님을 통해 치유받는
거룩한 우리자신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느티나무신부님ㅡ2006. 07. 09 연중 14주일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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