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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혈루증을 앓는 여자'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6 조회수496 추천수1 반대(0) 신고
<혈루증을 앓는 여자>(마태 9,18-26)

 -유광수 신부-

 

 "그 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고 이르셨다. 바로 그 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오늘 복음은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말씀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혈루증(하혈)을 앓고 있지 않은 건강한 사람인데 나와는 관계가 없는 말씀이다. 아마도 이 말씀은 오늘 날 하혈하는 병을 앓고 있는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겠지 하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과연 그럴까?

 

복음에서 열두 이라는 숫자는 충만한 완전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는 어느 일정한 기간만이 아니라 평생 혈루증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 여자의 일생은 혈루증으로 시작해서 혈루증으로 인생을 끝내야하는 불행한 여인이다. 그럼 도대체 혈루증이란 무슨 병인가?

 

마르코 복음에서는 "큰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부인이 있었다. 그 여자는 많은 의사의 손에 숱한 고생을 하며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마르 5, 25-26)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혈루증을 고치기 위해 안해 본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를 더욱 절망스럽게 만든 것은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는 것이다.

 

도대체 혈루증이란 어떤 병인가? 복음은 이 혈루증이라는 병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혈루증이란 피가 밖으로 흘러 나오는 병이다. 피는 생명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생명인 피가 밖으로 계속해서 흘러나온다는 것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나올 피가 없으면 죽는다. 피를 멈추지 않으면 이 여자는 죽는다. 따라서 혈루증이란 단순한 병이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 하는 병이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고 있다는 말은 평생 죽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하혈한다는 것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루 하루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이 죽음의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이다.

 

그 누구도 이 병에서 제외된 사람이 없고 또 그 누구도 이 병을 치료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 죽음의 병에서 치유받기 위해 좋은 음식, 좋은 약, 좋은 의사, 좋은 공기, 좋은 운동 등 모든 수단들을 다 동원해보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이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상황이다. 나의 모습이요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누가 나의 이 죽음의 행진을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하혈하는 피를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동원해보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불가능한 병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르코 복음을 보면 이 여자가 절망 중에 있을 때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래서 이 여자는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던 것이다.

 

이 여자는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면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만졌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내 병이 낳겠지."하지 않고 "구원을 받겠지"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오늘 복음은 단순히 하혈병을 앓고 있는 여자를 치유시켜주셨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죽음의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병에 걸려있지만 이 죽음의 병에서 치유받는 것이 곧 구원이다. 따라서 구원은 죽음에서 건져내어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구원은 죽어가는 자를 살려내는 것이다. 구원은 죽음의 행진을 멈추고 생명의 길로 행진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단순히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을 치유시켜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살려내기 위해 오신 것이다. 즉 죽음에서의 해방을 가져다 주러 오신 것이다.

 

이 여자가 예수를 만난 것은 생명을 만난 것이요, 예수의 옷에 손을 댄 것은 생명수를 마실 수 있는 파이프를 댄 것이다. 이 여자는 파이프를 통해 생명수를 마심으로써 살아나게 된 것이다. 즉 죽음의 행진을 멈추고 생명의 행진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예수님은 이 여자를 돌아보고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였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는 병을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행위이다. 믿음이란 예수님 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믿음이란 죽어가는 나를 살릴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라는 진리를 깨닫고 그분께 자신의 병을 맡기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죽어가는 나를 살리는 믿음이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여러 가지 중에 한가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닌 오직 예수님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그분께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내 맡기는 믿음이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믿음이어야 한다.


그럼 우리는 어디에서 예수님을 만질 수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모시면서도 예수님을 만지지 못한다. 미사 참례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만지 못한다. 복음을 읽으면서도 예수님을 만지지 못한다. 죄 사함을 받는 고해 성사를 보면서도 전혀 예수님을 만지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만지는 믿음이 아니라 형식적인 신앙생활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수동적이요, 형식적이다. 가라니까 가고 오라니까 오고 참례하라니까 참례한다. 그렇지만 아무 느낌도 없고 감격도 없다.

 

예수님을 만지지 못하는 믿음이 과연 나를 구원하는 믿음일까? 

우리는 복음을 읽으면서도 예수님을 만져야 하고 성체를 모시면서도 예수님을 만져야 한다. 고해성사를 통해서도 예수님을 만져야 하고 봉사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만져야 한다.

 

추상적인 믿음에서 만지는 믿음으로 발전해야 한다.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만져져야 하는 믿음으로 성숙되어야 한다. 그래야 나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예수님께 내 맡길 수 있고 죽음에서 나를 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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