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께 가는 길에서 겪게 되는 칼의 노래 - 윤경재 | |||
---|---|---|---|---|
작성자윤경재 | 작성일2009-07-13 | 조회수572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주님께 가는 길에서 겪게 되는 칼의 노래 - 윤경재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 10,34-39)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평화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평화는 전쟁과 다툼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분열이 아니라 행동통일을 뜻합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권력이 변화하지 않고 안정되어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한 번 맺어진 균형추가 움직이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것을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힘이 있는 자, 지배자는 늘 지배하고 권력을 행사하고 억눌려 지내는 삶들은 언제나 억눌려 지내는 상태를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 즉 샬롬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지고 언제나 하느님의 정의가 구현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끈임 없이 개선되어야 하는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느님과는 달리 약하고 변하기 쉬우며 죄에 빠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느님께로 향하는 길목에서 장애를 만나고 잘못된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어느 길이 하느님께 향하는 올바른 길인지 살펴야 합니다. 또 인간은 공동체로 살기에 언제나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지냅니다. 자기가 아무리 처신을 잘하려 해도 이웃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길은 정지되고 움직임이 없는 길이 아니라 끝없이 변화하고 성장하여야 하는 길입니다. 오히려 정지 된 생은 평화가 아닐 수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듯이 우리의 삶도 새롭게 변화 되어야 합니다. 태양이 언제나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듯이 우리도 또한 하느님을 향한 움직임을 쉬어서는 안 됩니다. 팽이가 제자리에서 서 있으려면 힘차게 돌아야 하듯이 평화도 움직임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릇된 것이 무엇인지 살펴서 덜어내고 교정하려고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넘어섭니다. 평화는 정지 상태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움직임입니다. 칼은 박해이며 분별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길에서 겪게 되는 장애를 말하며, 그 장애를 넘으면서 맞게 되는 어려움입니다. 그 장애는 스스로 만들 수도 있으며, 외부에서 올 수도 있습니다. 자기마저 장애로 여기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면 집안 식구도 당연히 장애의 대상이 됩니다. 미카 예언서에서 마지막 날에 벌어질 인간의 죄악상을 그린 구절이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그러나 나는 주님을 바라보고 내 구원의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내 하느님께서 내 청을 들어 주시리라.” (미카 7,6) 여기서 심판 날에 벌어지는 죄악상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지상에 오셨다고 마지막 날에 벌어질 사건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여전히 생길 것이라 확언하시는 것입니다. 종말과 심판은 반드시 있을 터이니 하느님을 향한 선택을 분명히 내리고 자신의 처신을 확실하게 나타내 보이라는 요구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달콤한 명예와 이익을 미워하고 하느님을 향한 길에서 십자가를 지려는 태도를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생명을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미래에서만이 아니라 현세에서도 넘치도록 받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라고 외치는 예언자 사이의 갈등은 커다란 주제입니다. 왕권과 예언자의 저항은 구약성경의 저류를 관통하는 존재 이유가 됩니다. 불행히도 예언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때 왕권도 무너졌습니다. 일일이 간섭한다고 예언자의 목소리를 듣기 싫어하면 그 왕은 곧 불행의 길로 떨어졌습니다. 이 둘 사이의 갈등은 상극이며 동시에 상생하는 관계였습니다. 이 역사적 진리는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한 그 어떤 집단에서도 계속 유지될 것입니다. 어떤 정부와 권력도 예언자의 목소리를 잠재우려 한다면 그 세력은 조만간 와해되고 말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더 큰 시련에 휩싸일 것입니다. 개인도 자신에게 칼을 들이댈 용기를 잃어버린다면 그는 심판의 날에 어둠 속에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