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괴 성모님 순례지 김웅열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 우리들은 복음에서 주님의 기도를 배웠습니다.
신자가 되는 순간, 예비자 교리반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세례 받고 죽는 순간까지 우리 신자들이 제일 많이 해야 하는 기도가 소위 주모경 그중에서도 주님의 기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주님의 기도는 분명히 제자들에게 주신 기도입니다.
제자인 척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고, 서류상의 제자만이 아니고, 무늬만의 천주교신자들에게 주신 그런 기도가 아니라 참 제자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기도입니다.
우리들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세례 때 축성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귀하고 비싼 존재일수록 썩을 때 보면 냄새가 역합니다.
생선 한 마리 썩을 때 나는 냄새보다는 사람의 송장이 썩을 때나는 냄새가 더 역합니다.
풀이하면 귀하고 비싼 존재일수록 썩을 때 보면 냄새가 역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제자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자연과 우주에 대한 봉헌이 들어있는 하느님의 기도입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맑은 영으로 읽고 묵상해야만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어느 성인은 한평생을 주님의 기도 하나만을 묵상하시면서 사셨다고 합니다.
왜냐?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도이며 붙이거나 더하거나 뗄 것이 없는
가장 완벽한 기도이기 때문에 주님의 기도 하나만을 가지고 한평생을 살수가 있을 겁니다.
사제생활 25년을 하면서 저는 아직도 주님의 기도를 하면 앞에 첫마디에서 더 나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첫마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입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를 하면서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자꾸 돌아가신 내 친아버지가 생각이 납니다.
어떤 신부님은 어릴 때 아버지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기에 주님의 기도를 할 때마다 상처받았던/ 그 어릴 적 상처가 생각이 나서 주님의 기도를 못 드린다고 하는 신부님도 저는 보았습니다.
저도 역시 주님의 기도를 하면서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항상 떠올랐습니다.
하도 그것이 분심이 들어서 ‘아버지, 저는 당신을 부르는 게 아니라 저 위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는 건데 왜 자꾸 저에게 나타나시는 겁니까? 이젠 오지 마십시오.’ 했더니 그래도 계속 오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밤에 깨달은 것은 내가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하느님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내 친아버지, 돌아가신 친아버지가 떠오르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배운 것이 아버지로부터였고/ 기도하는 법을 배운 것이 아버지로부터였고/ 정의롭게 살아야한다는 것을 배운 것도 내 친아버지로부터였고/ 봉사하면서 사는 것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배운 것도 내 친 아버지였던 겁니다.
내게는 아버지가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의 모습으로 찾아오셨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아버지 하면은 탕자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둘째아들인 이 탕자는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은 아버지 대하 듯하면서
‘유산 내어놓으시오!’
미리 유산을 빼앗아 나갑니다.
나에게, 우리 각자에게 하느님아버지는 살아계신 분입니다.
나는 탕자처럼 살아계신 아버지를 죽은 아버지 대하듯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나에게 하느님은 문자화된 목석같은 분은 아니십니까?
우리는 생각해봐야 됩니다.
과연 나는 사제생활동안 살아계신 하느님을 몇 번이나 체험했는가?
철학자요 신앙가였던 파스칼은 하느님을 체험했던
그날을/ 그 시간을/ 잊기 않기 위해서/ 양피지에다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그리고 나 파스칼의 하느님을
몇 년 몇 월 몇 시에 만났다하는 그것을 적어서 항상 주머니 안단에다가 붙이고 다녔다그럽니다.
신앙이 흔들릴 때마다 하느님아버지를 체험했던 그날을 상기하면서 약해지는 신앙을 다잡았다고 그럽니다.
역동적이고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때
우리의 삶은/ 또는 사제의 삶은 직업으로 전락합니다.
미사주는 기계, 성사 주는 기계,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바로 성령을 주신다고 그랬습니다.
성령에 대한 체험이 없으면 하느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평신도들도 늘 끌려 다니는 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수도 없이 냉담에 빠집니다.
미사시간에 한 시간 앉아있어도 머리는 늘 딴 데 가있고 앞은 사제를 쳐다보고 제대를 쳐다보더라도 혼수상태에 빠져서 미사를 드립니다.
묵주신공을 하더라도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에 늘 형식적으로 해치웁니다.
하느님은 당신자신이 죽은 아버지가 아니라 살아있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우리 삶의 곳곳에 숨겨놓으시고 알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말씀 중에 당신이 살아있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사제의 강론을 듣고 그 피정테이프 하나를 듣고 인생이 변합니다.
죽으려고 했던 사람이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갑니다.
냉담 중에 빠졌던 사람이 사제의 말씀을 듣고, 성서의 가르침을 듣고 다시 새 출발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13절에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서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낸다> 고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계신 하느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첫 번째 장소는 바로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은 성사를 통해서 당신이 살아있다고 하는 거를 알려주십니다.
미사 때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축성된 성체가 죄인인 우리의 몸 안에 들어올 때마다 우리는 온몸에 전율이 옵니다.
사실은 눈물, 콧물이 앞을 가려서 눈물이 앞서야 됩니다.
수십 년 동안 성체를 영하고도 한 번도 성체를 영할 때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아오른 적이 없다든지 눈물을 앞을 가린 적이 없다 그런다면 아직까지 성체는 그저 세례 받았으니깐 받아먹는 것이지... 그 안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를 만난 것은 아닐 겁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죄인이 하느님을 만납니다.
병자성사를 통해서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주고 하느님께 인도합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 세상 어느 종교에도 없는 은총의 운하와 같은 이 성사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사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래도 영적인 에너지를 받는 것은 미사를 드릴 때입니다.
미사를 드릴 때마다 많은 힘을 받습니다.
세 번째, 체험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느님 아버지를 만납니다.
체험 중에서도 실패의 체험을 통해서 가장 강하게 만납니다.
실패의 영성은 모든 영성의 제일위에 있습니다.
다윗 왕이 남의 아내를 탐했던 뼈아픈 시련을 통해서 성인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그 발로 딛기 어려운 가시덤불속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년의 광야에서의 시련을 통해서 가나안땅으로 들어갑니다.
베드로가 세 번의 배반이라고 하는 치욕적인 사건을 통해서 으뜸제자가 됩니다.
실패의 영성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이렇게 하느님 아버지는 죽은 목석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성사를 통해서
체험을 통해서 오십니다.
우루과이에 있는 작은 성당 벽에 주님의 묵상기도가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늘 세상일에만 빠져있으면서
‘우리’ 라고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 라고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 산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라고 하지 말아라.
늘 자기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지 말아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라고 하지 말아라.
항상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하지 말아라.
너는 늘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쌓아두려고 하지 않았느냐?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시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라고 하지 말아라.
누군가에게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지 않으냐?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라고 하지 말아라.
너는 늘 죄지을 기회를 찾아다니고 있지 않느냐?
‘악에서 구하소서!’ 라고 하지 말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못 듣지 않았느냐?
아멘! 이라고 하지도 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면서
오늘 우리들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겁니다.
묵주기도를 하고 저녁만가를 바치고 하루에도 여러 번씩 이 위대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자연과 우주에 대한 모든 봉헌이 들어있는
이 하느님의 기도를 바칠 겁니다.
기도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의 뼛속으로 스며들어서 우리를 하느님 앞으로
인도해주시기를 간절히 청합시다.
아멘!
♧느티나무신부님ㅡ2007. 07. 29일 연중 제 17주일 가르침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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