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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체투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두번째 해설]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27 조회수388 추천수4 반대(0) 신고
 
 
 
개념에 의하여 대상을 사유하는 것 / 계시에 의하여 대상을 사유하는 것 =>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추측한다. => 사람들은 계시를 해석한다. => '교회의 가르침' 하고는 상관없이 해석한다. 현실에 따라 '진리는 순환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단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한다. '초보수주의'자들이다고 비웃기도 한다 => '하느님의 진리'를 '인간의 진리'로 만들려는 유혹과 구분되어야 하는 필연성을 바르트는 말하고 있다. => 신앙이란 결코 값싼 믿음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참된 신앙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위한 영적투쟁의 원천인 것이다.
 
[신앙 = 이념] 이다 => 계시를 현실에 따라 해석함으로써 '진리는 순환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념에 몰입되어 신앙(신학이 아닌)이 죽었다면 '하느님의 진리'를 '인간의 진리'로 만들려는 유혹에 빠진 것이다. 이념에 몰입되어 있으면 [신앙 = 이념]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계시(말씀)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모든 계시가 이념적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 하느님의 진리가 우리의 사유를 주장하지만 우리는 그 진리에 대하여 사실적이며 존재적 진리임을 증거할수 있을 뿐 사유(해석)의 초월성에는 대단히 주의하여야 한다.
 
예를들면, [나 (우리) =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안증회에서는 모두가 예수이다. 뉴 에이지에서도 그러하다. 민중신학에서는 민중 = 예수로 본다.] 어떤 분들은 교황청 (교회의 교리, 가르침)을 넘어섬으로써 나 = 교회라고 하며 인간(초인간)이 말씀을 해석한다. 다른 주장을 해대기도 한다. 자신이 해석한 것을 인정받지 못하면 ('진리의 순환'이라는 측면에서) 상대방을 이념적으로 비난한다. 예수라는 원천에서 끌어올리지 못한다고 힐난한다. / 하지만 예수라는 원천이 '자기 이념'에 의해서 끌어올려지는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이념적으로 갈등을 일으켜 동정을 받고자 선동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념을 증언하는 것이지 - 예수님을 증언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 신앙 = 인간의 한계와 하느님의 진리를 알게 하는 참되고 영원한 경계에 대한 올바른 언어의 발견은 그리스도론 적으로 그리스도론의 문장들의 안이나 밖이 아닌 결국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게 된다. => 그리스도 =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평화)등등을 증언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그리스도 이시다. 그리스도(예수님)는 '다른 그리스도(예수님)'가 아니시다. 이념을 증언하려고 한다면 '예수라는 원천'에 가더라도 예수님은 없을 것이다. 만일 있었다면 자기 이념이 만든 허상이다. / 이념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는게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
 
겸손과 온유와 가난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악을 수용한다면 이념으로는 가능하지만 '그리스도의 원천'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끊어진 길을 이어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화해이며 하느님의 진리이다. 이 화해와 사랑은 막힌 것을 뚫는다. 신학적 언어는 인식론적인 문제를 실천적인 진리에로 옮기는 진리의 문장이어야 한다. => 실천적인 이념에로 옮기는 이념의 문장이어야 하는게 아닌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섬김(신앙)은 인간에 대한 봉사가 되어지는 것이다. => 이념에 대한 봉사가 아니다. 이념(초보수주의 - 진보주의 갈등)을 잘 만들어 내려고 이념에게 봉사해서는 안 된다. 한 신앙 안에서 [나 = 교회]라고 하여 자기 이념(주관)으로 신앙을 도구화하고 이념에게 사람이 봉사하도록 사람을 수단화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칼 바르트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에 대한 말이나 하느님에 대한 사유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느님에 대한 말씀 가운데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느님을 사유하는 것이다] / 하느님이 스스로 사유하는 길을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길은 어떤 길인가? 성서 안에 하느님을 사유하는 길이다. 성서를 성서로써 하느님의 계시를 담은 책으로써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성서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 / 이념에 신앙이 도구화 되지 않고, 사람이 수단화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증언해야지 신앙을 가지고 이념을 증언한다면 그렇게 변질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 가운데 계시도록 자신을 비워 드린다면 피조물의 눈물과 아픔은 사라지게 된다. 인간이 말씀(주님)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주님)이 인간을 해석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 죽은 언어 = 인간이 '하느님의 진리'를 '인간의 진리'로 만드는 온갖 것이다. '인간의 진리' = 이념이며 변형된 세속주의 곧, '교묘한 세속주의' 이다. / '예수님 없는 예수' 또는 '예수님 없는 교회'가 되지 말아야 한다. 오체투지 속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자신을 비워 - 말씀(예수님)이 인간을 해석하시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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