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편하게 .... 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찬미예수님
기적은 뭐냐?
아침에 눈꺼풀이 열린 것이 기적이에요.
그렇지요?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도 신문에 안날뿐이지. 하룻밤사이에 심장마비로 죽는 사람이 500명이 넘어간대요.
그 외에도 교통사고 뭐 이런저런 사고.... 해서 많은 사람이 죽어요.
그래서 아침에 이 셧다가 올라가는 것만 해도 이건 은총이고 기적이에요.
밤에 잠자리에 든다는 것은 죽음의 상태에 들어가는 거죠?
눈이 감아지는 그 순간부터 그 다음날 아침에 깰 때까지...죽음의 일곱 시간, 여덟 시간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기면서 ‘내일 아침에 눈뜨게 해주십시오.’
여러분들 그런 기도 안하시죠?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먼데서만 찾는 것이 아니고
짧아지는 다리가 길어지는 것만 기적이 아니고
암 덩어리가 없어지는 것만 기적이 아니고
내가 내 손가락으로 묵주를 굴릴 수 있는 것도 기적이고
아침에 눈을 떠서 햇빛을 볼 수 있고,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고, 내 두 다리로
성당을 오고 성지를 찾아오는 것만 해도 기적이 아니겠는가!
아멘
예수님의 기적은 인간을 대상으로 한 기적이 있고, 자연을 대상으로 한 기적이 있죠?
인간을 대상으로 한 기적은 세 가지로 나눠요.
첫 번째, 치유
두 번째, 구마
세 번째, 소생
예수님이 사람을 대상으로 한 기적은 치유와 구마와 소생
그리고 자연을 대상으로 한 기적도 있었지요?
풍랑이 일던 바다가 ‘잠잠해져라.’ 하니까 잠잠해졌고....
요한복음 맨 마지막에 보면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것도 하늘과 땅을 채울 정도로 많다고 그랬어요.
성서에 기록되어있는 기적은 극히 일부분일거예요.
예수님은 그 짧은 공생활 삼년동안 하느님의 말씀만 전하신 것이 아니라 왜 기적을 보여주셨을까?
한마디로 하느님의 능력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함이었지요.
기적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기적만 보였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그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온 대로 티베리아 호수 건너편까지 쫓아 온 것도 예수님의 말씀듣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병 낫기 위해서입니까?
솔직히 얘기해서.......그래요. 병 낫기 위해서지요.
기적을 보고 그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 치유 받고 구마받기 위해서 왔지....
저 분이 메시아인지 상관도 없었어요.
‘저 사람을 쫓아다니다 보면 병이 낫는다... 팥고물이라도 떨어진다.’
그러니까 그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 기를 쓰고 예수님을 쫓아다녔던 겁니다.
상상하건데 오늘 복음에 남자만도 오천 명이라고 그랬어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종교집회에 남자가 더 많이 옵니까? 여자가 더 많이 옵니까?
당연히 여자가 더 많이 오죠.
남자가 오천 명이면 적어도 곱하기 3내지 4를 해야 돼요. 그럼 최소한 그 자리에 만 오천 명 이상 되는
사람이 따라왔다는 것인데 지금 만 오천 명이 모이는 집회도 큰 집회예요.
체육관 하나가 가득~ 찰 수 있는 집회인데, 그 당시 만 오천 명이면 상상할 수 없이 많은 인구였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환자들이었을 겁니다.
환자 가운데는 영이 병든 환자도 있고, 몸뚱아리가 병든 환자도 있었겠죠.
어떤 사람은 지게에 업혀 오는 환자도 있었을 거고, 가족들이 들것에다가 아버지를 누이고 실려 오는 자도 있었을 것이고, 마귀가 들려서 들고 날뛰는 부마자들은 동네 친구들이 팔다리 하나씩을 끙끙거리면서
난동 부리지 않게 붙들고 왔을 겁니다.
예수님 앞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영이 병들고, 육이 병든 자들이 대부분이었을 겁니다.
지금처럼 의술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었으니 얼마나 병이 많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정신병 환자들이 있었겠습니까?
그것을 통해서 치고 들어오는 마귀의 활동도 얼마나 컸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온 그 많은 사람들이 믿음 때문에 온 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계셨지만, 예수님은 까칠하게 한 사람 한 사람 확인해 가면서, 그 사람의 믿음을 검증해가면서 치유시키거나 구마 시키시지 않으셨습니다.
성서에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구나!’
하는 그 말을 들을 정도로, 믿음을 본 다음에 그 사람을 치유하고 구마한 경우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듭니다.
나머지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99%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었어요.
아까 얘기한대로 ‘저 사람만 쫓아다니면 병 낫는대.마귀가 떨어진대.’
오로지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믿음이 단순히 기복적인 것을 알면서도 하나하나 불러서
면담하면서 믿음을 확인하지 않았죠.
‘너 꾸르실료 받았냐?’
‘성령세미나 갔다 왔냐?’
‘교무금은 잘 내냐?’
‘주일은 잘 지키냐?’
이런 것 따져 묻지 않고 무조건 하느님의 연민 때문에 치유시키고 구마 시켜주셨어요.
이 성모님의 성지에는 천주교 신자만 오는 것이 아니라 개신교 신자들도 많이 오고, 불교 신자들도 오고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많이 오는데 놀랍게도 이곳에 와서 불교신자도 치유를 받고 가요.
개신교 신자들도 치유를 받고 가요.
오죽하면 작년 10월에 눈이 먼 목사가 와서 눈까지 뜨고 갔겠는가!
다시 말하면 하느님은 천주교 신자에게만 비를 내려주시지 않는다.
물론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받는 특별한 은총이 있지만, 하느님이 밴댕이 속처럼 그렇게 좁지 않으세요.
빛이 강한 성지에 찾아오면 어느 사람이건 간에 하느님의, 그리고 성모님의 전구로 치유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과 영혼이 서로 큰 영향을 준다고 알고 계셨기에
틈만 나면 하나하나 따져 묻지 않고 끊임없이 치유를 하셨고 그리고 끊임없이 구마 시켜 주셨습니다.
저도 피정을 다니다 보면 많은 환자들을 봅니다.
이 성모님 성지에도 하루에도 수많은 환자들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도 많은 환자들이 앉아있는 것으로 압니다.
또 피정 중에, 말씀 중에 환자들의 영이 치유되고 육이 치유됩니다.
그리고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영적자유를 누리고 해방되어 돌아가는 것을 봅니다.
내적치유를 통해서 외적치유를 같이 받습니다.
영이 치유되면 육이 치유됩니다.
그래서 치유는 예수님의 중요한 구원사업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주님이 하신 이 기적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다섯 개의 빵과 두개의 물고기를 가지고 만든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기적 중에서 가장 큰 기적 중에 하나인데, 이 기적은 다른 말로 성체성사의 기적이라고도 표현합니다. 두 가지의 큰 덕이 합쳐져서 이렇게 큰 기적을 이룰 수가 있었다는 것이죠.
첫 번째는 순명의 덕입니다.
또 한 가지는 봉헌의 덕입니다.
오늘 이 어마어마한 기적이 나오게 된 밑바탕에는
순명+봉헌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큰 기적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죠.
첫 번째가 순명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빵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을 좀 먹여야 되겠다.’ 하시며 필립보를 쳐다보셨습니다.
필립보는 첫마디가 뭐예요?
‘아니 왜 날 쳐다보세요? 아, 이 인간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 가지고도 모자라요. 그리고 여기 인간도 없는데 왜 날 쳐다보고 나보고 해결하라고 그러세요? 못해요. 왜 하필이면 접니까? 왜 저에게 불가능을 요구하십니까?
이 필립보를 절망주의자, 회의론자, 부정론자라고 그럽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예화 중에 우산장수와 짚신장수 이야기가 있어요.
딸 둘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큰 딸은 우산장수에게, 작은 딸은 짚신장수에게 시집을 보냈어요.
비만 오면 엄마는 누구 걱정을 하고 울었겠어요?
그렇지요, 짚신장수한테 시집 간 딸 생각을 하고 울었어요.
또 해만 나오면 누구 생각을 하고 울었겠어요?
그렇지요...짚신 장수한테 시집 간 딸을 생각하며 울었어요.
그러니 이 엄마는 해가 나도 ‘징징~~’ 비가 와도 ‘징징~~’
365일 징징시리즈로 살았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반대야
“아유, 비만 오면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아이구~~비님, 감사합니다.”
‘우산 장수한테 시집간 딸, 우산 팔아서 시래기죽이라도 끓여 먹겠구나!’
또 해가 나면 해한테 큰 절을 하면서
“아이구~ 해님, 감사합니다.”
‘해가 났으니 짚신 팔아서 호박죽이라도 끓여먹겠네~~’
아버지는 비가 와도 하느님께 감사, 해가 떠도 감사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똑같이 해가 뜨고 비가 내렸건만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았어요.
이 엄마를 절망주의자, 부정론자, 회의론자
아버지를 희망론자, 낙관론자
엄마는 종교인이지만 아버지는 신앙인이었어요.
그럼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아버지 쪽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맞습니까? 어머니 쪽으로 살아야 합니까?
그런데 얼굴들은 왜 우거지상입니까?
얼굴들 좀 펴십시오.
잠언 13장 12절에 보면
희망이 끊어지면 마음이 병들고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면 생기가 솟는다.
로마서 8장 28절에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히브리서 7장 19절에는
하느님께서는 더 좋은 희망을 주셨고 우리는 그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도 머릿속으로 손익계산을 한 겁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해, 안 돼!’
어느 회장님이 등산에 하다가 발을 헛디뎌서 절벽으로 떨어졌대요. 한참을 미끌어지다가 나무 가지 하나를 손에 탁~ 움켜쥐고 대롱대롱 매달렸어요.
캄캄한 밤중에 아무도 없는데 나뭇가지 하나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결국에는 하느님 쳐다보면서
“저 감곡성당에 박회장입니다...저 좀 살려주세요.”
하느님께서 정원을 거니시다가 밑에서 무슨 소리가 나서 이렇게 내려다보니까 박회장이 나뭇가지 하나 붙들고 매달려 있으니까
“너 거기서 뭐 하냐?”
“제가 산에 왔다가 미끌어져서 이렇게 매달려 있으니 저 좀 살려주세요!”
“너, 순명할거니?”
“그럼 손 놔라!”
'아니 살려달라고 했는데 손을 눟으라고 하시다니....저 양반 연세가 드셔서 오락가락 하시나~~’
하느님이 내려다보시다가 박회장이 나뭇가지를 더 움켜잡고 있으니까
‘말도 안 듣는 놈, 니가 알아서 해라!’
어쩌다 보니까 ‘뚝~~’ 하면서 나뭇가지가 뿌러졌어.
“아이쿠~~”
‘쿵~’ 하고 떨어져보니까 땅바닥이 20센티밖에 안 돼.
떨어지고 나서 이 회장은 땅을 치고 통곡을 했대요.
‘주님 말씀에 순명했어야 했는데.....’
하느님 믿고 놓으라고 했을 때 손을 놓았더라면
“장하다 내 아들, 너는 순명했으니 아브라함에게 내렸던 축복을 너에게 내려주마!”
하느님 째려보면서 속으로 오만 생각을 다하고 지 머리가 하느님보다 앞선다고 생각하면서
‘이걸 왜 놔! 이것 놓으면 내가 죽는데.....’
기적은 놓는 겁니다.
힘을 빼는 거고, 포기하는 겁니다.
기적은 내가 애착하는 것, 내가 그것 없으면 안 돼 하는 것, 그걸 놔 버리면 되요.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이 불안하고 행복하지 않다면 그 99% 이유는 분명히
아직 놓지 않는 못하는 게 있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겁니다.
안드레아는 그 옆에 있다가 뭐라고 그래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제가 압니다...제가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빵을 모아 오면
그 다음은 주님이 해결해 주실겁니다. 다니다보면 빵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여기 빵 있는 사람 없어요, 주님이 빵 찾아요...”
빵가게 주인도 다 없어졌어요.
어른들이 지 입에 넣을 것 왜 안 챙겨 다녔겠어요.
‘이것 주면 내가 굶는데.....’
지 입에 들어갈거니까 내놓지 않지요.
그 중에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아이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2마리를 내어 놓았어요.
아마 그 아이도 어딘가 아픈 곳이 있었겠지요. 엄마가 그 아이 허리에 이것을 채워 주면서
‘너 이 빵 다섯 개 가지고 네가 나을 때까지 예수님 쫓아 다녀라. 이 빵 한 개가 하루치다.“
지금은 웰빙 음식으로 보리빵을 먹지만 옛날에는 유대인 중에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빵이
보리빵이에요.
안드레아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가서 나누니까 바구니에서
빵 다섯 개가 계속...계속 나오는 거예요....15000명 넘는 사람을 먹였는데도 12광주리가 남았어요.
이게 바로 봉헌이에요.
봉헌은 내 것의 일부를 떼어서 내는 게 아니라고 했지요?
봉헌의 정의는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 봉헌이에요.
머리 끝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내 꺼’는 존재하지 않아요.
여러분 내 자식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여러분 자식입니까?
여러분 몸뚱아리가 여러분 것입니까?
몸뚱아리가 내꺼라면 내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손톱하나, 머리카락 하나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신앙인의 입에서는 ‘나의’ 라고 하는 말은 없어져야 되지요.
‘내 몸은 성령님의 것이요. 내 자식은 성모님의 것이다!’
이게 바로 사랑의 대명사지, 이기적인 대명사는 우리 신앙인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순종은 선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교회 역사나 한 개인의 성화도 순종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히브리서 5장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었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끔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순종시키기
위함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첫 번째가 순명,
두 번째가 봉헌
그 소년이 만일 빵을 내놓기를 거절했다면 남자만도 5천명을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
위대하고 찬란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물론 예수님은 無를 가지고도 有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빵이 진짜 필요해서 필립보를 떠본 것 아닙니다.
예수님은 돌멩이 가지고도, 15000명 주변에 널려 있는 풀을 가지고도 빵을 만드실 수 있으십니다.
하느님이시니까~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필요로 하시고 그것을 유용하게 쓰십니다.
우리말에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지요?,
‘나는 재주가 없어서 성당에서 봉사할래야 할 수가 없어...’
왜 재주가 없어요?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내 능력이라고 해도
“쓰십시오...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주님이 쓰신다면 가져가십시오.”
하느님께 내어놓기만 하면 그 보잘것없는 개떡 다섯 개와 말라 비틀어진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도
찬란한 기적을 이루셨어요.
그 소년의 봉헌, 왜 기적이 안 일어나겠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그리스도께 드리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기적이 안 일어나지요.
우리가 있는 그대로를 봉사의 제단, 봉헌의 제단에 바친다면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무수한 기적을 행하실 겁니다.
역대기 1서 29장 16절에
하느님의 손에서 받은 것이 있기에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칩니다.
나의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정직한 사람을 반기실 줄 알아
이 모든 것을 사심 없이 바칩니다.
요한 17장 19절에는 .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사제의 입술을 통해서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봉헌되셨습니다. 이제 잠시 후에는
당신의 몸까지 여러분에게 봉헌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죗덩어리 인간에게 봉헌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봉헌되셨듯이 우리도 주님께 우리를 봉헌합시다. 아멘
♧ 2009년 7. 26일 - 연중 제 17주일 (느티나무신부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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